제대한지 2달여가 지나간다.
해군사관후보생 시험에 응시하다.
대학생활과 졸업
영장
입교&훈련 ☞
임관식
초군반과 첫 부임지
새벽별 반짝이는 저기 서해에 - 부천함으로 가다. ☞
나만 2함대에 계속 남는다 - 어청도 고속정 부장으로 가다. ☞
1년6개월의 고속정생활을 마치고 동해로 간다. ☞
아산만기지 건설사업단 ☞
2함대 화학대 ☞

제대한지 2달여가 지나간다.

2001년 8월... 제대한지 2달여가 지나간다. '제대만 하면, 그렇게 가고싶던 아프리카도 가고, 백두대간도 종주하고, 여행도 실컷하고...' 많은 생각을 하였었지만, 다만 정말 생각뿐인듯 하다. 제대하면 하고픈 일중의 하나. 1994년 3월입교전 해군사관후보생 시절부터 2001년 6월 전역까지 나의 군생활을 정리해본다. ▲Top

해군사관후보생 시험에 응시하다.

고3때 이미 해군 사관후보생(NOCS;Naval Candidate Officer School) 제도에 대하여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고향이 강원도 동해시라서 어려서부터 해군을 보며 자라온 내게는 또 하나의 희망이었다. '나도 해군 장교가 될 수 있구나...'
1990년 3월 입학후 신입생환영회다, 동아리 가입이다, 정신없이 지낼무렵 학교 중앙게시판에 붙은 OCS모집 포스터를 보았다. 물론 망설일 것도 없이, 대전병무청으로 전화하여 필요한 서류에 대하여 자세히 문의한 후 '관리분석'병과로 지원하였고, 4월 9일 월요일 대전통합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21일 토요일 12시 대전 병무청에서 면접을 하였다.
신체검사는 '89년에 서울 후암동 병무청에서 받아본 신체검사와 별 차이가 없어 수월히 넘겼으나, 면접때는 상당히 긴장되었다. 무엇을 물어볼까... 하지만, 별로 어려운것은 아니었다. 지원동기, 내가 지원한 관리분석병과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보충설명등...
5월 21일 월요일 1차 발표에 합격후 7월 25일 관리분석으로 최종합격하였다. ▲Top

대학생활과 졸업

물론 해군,해병사관후보 장학생의 매력은 집에서 등록금을 받지 않고, 군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고, 졸업후 3~4개월의 훈련후 바로 해군,해병장교로 임관되어 7년간 군생활을 한다는 것이지만, 내게 그에 못지 않는 보람은 그때 만난 친구들인듯 하다.
윤창 ,형회, 은섭, 희욱, 용우, 세종, 동원 그리고 나... 『대전지구 해군,해병사관후보생 연합회 해암』 11기 동기와는 대학시절에도 참 많이들 만나서 술마시고, 이야기하고, 고민하고, 서로의 생일을 축해주고, 여행하고... 그렇게 세월은 흘러, 어느덧 졸업하게 되고, 1994년 3월 6일 일요일 오후 우리들은 대전역에서 마산행 열차를 타야했다. ▲Top

영장

1994년 1월인가 영장이 나왔으나 병과가 '함정'이었다.
해군본부에 문의해보니 '90년 지원당시 2지망이 '함정'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관리분석'과 '함정'의 가장 큰 차이는 '함정'은 전투병과로서 배를 타야 한다는 것이기에 나의 고생스러운 해군생활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듯하다. ▲Top

입교&훈련

입교전부터 실무생활중인 해군,해병 선배들로 부터 훈련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으나, 해군 교육사령부 기초군사학교의 사관후보생 과정은 정말 힘들었다.

    입교
    가입교식이 끝나고 함께온 부모,형제,친구들과 헤어져 그들의 시야에서 멀어지자 군사교육은 바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는 존대말로 좋게 대해주시던 빨간모자쓴 훈련관들의(1~2년 선배 장교들로 구성) 말투는 존대에서 명령조의 반말로 바뀌고 여러가지 명령들은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오와열을 정렬하고, 이동군기를 갖추고, 군가하고... 제대로 못하면, 전날 비가와서 질퍽하던 교육사령부의 비포장길에서 기합받고, 오리걸음하고... 이렇게 우리들은 우리들의 보금자리 8,9병사로 이동하였다. ▲Top
    숙소 8,9병사
    선배들은 충용관, 무용관이라는 6인 1실의 2층 침대와 옷장이 있는 내무실에서 생활했는데 우리들은 수가 너무 많아서인지, 충용관, 무용관에 벌써 사람들이 들어있어서인지 -해사48기 초군반 교육중이었다.- 일제때 지어져 창고로 사용중이던 제8,9병사를 급조하여 한 동에 200여명이 생활하였고 해병 3중대 동기들은 멀리 떨어진 이름모를 건물에서 생활하였다. 낡은 8,9병사의 창틈으로는 초봄의 매서운 바닷바람이 거침없이 들어오고, 침상사이 복도의 시멘트 바닥은 언제나 뿌연 먼지를 피어올려 우리들의 목을 간지럽혔다. 동,서쪽 각각 하나씩 있던 출입구 한편에 서면 반대쪽 출입구가 가물 가물 보였던것이 단지 멀어서만은 아닌듯 했다. 물론 난방시설은 전혀 없었고, 입교 며칠후 그 큰 단층건물 중앙에 폐기름을 태우는 난로 하나를 놓았지만, 따뜻하기는커녕 그 폐기름을 태우는 연기 때문에 더 고생하였다. 아마 생색내기였나 보다. 훈련이 끝날 때쯤 충용관, 무용관으로 들어갔는데 덕분에 거기서 생활하던 수병 훈련병들이 8,9병사로 왔다. 그때 병사를 본 작대기 하나의 훈련병이 하는말 "여기서 살란 말이야. 이런데서 어떻게 사람이 살어!" ▲Top
    천지관
    천지관은 우리들이 이용하는 식당의 이름이다. 몇 명이나 들어갈까?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하여간 2~3백여명은 들어갔던 것 같다. 그래도 사상 최대의 숫자라는 우리 88기 동기들이 한번에 식사를 할 수는 없었다. 안에서는 식사하고 밖에서는 선착순 하고...
    천지관에 관한 이야기는 두가지만 하자. 하나는 음악이다. 일명 기생가... 언제나 식사때면 나오던 음악. 나중에는 장교로 임관해서 진해시내 길을 걷다가도 그 음악만 나오면 위가 자극을 받아 위액이 절로 나오더라고 농담하던 음악 3곡.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사이', 김건모의 '핑계', Ace of base의 'All that she wants'. 지금도 Ace of base의 'All that she wants'를 들으면 음악과 함께 수 백명이 식판과 숟가락이 부딪혀 만드는 소리가 함께 들려오는 것 같다.
    두 번째는 식사시간이다. 식사준비가 끝나면 1~2백명의 인원이 "나는가장 강하고 멋있고 미더운 해군(해병) 장교가 된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고 외치며 식사를 시작하면 정말 식판소리는 대단했다. 그럼 식당앞 단상 -천지관은 때론 강당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무대가 잘 만들어져 있었다.-에 서 있던훈련관이 호루라기를 분다. 그럼 어김없이 앞부분에 두 가닥의 포크라 달린 숟가락을 놓고 앉은채 차렷자세를 한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조용히 못 먹나. 식사시작!" 그럼 정말 쥐 죽은 듯하다. '사각사각' 어쩜 그렇게 신기할 수가. 하지만 그 식사시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 밥먹느라 정신 팔려 아무도 시간은 재어보지 못했지만, 1~2분 길면 3분... 그것도 그날 당직 훈련관 기분 따라서인가? 어떤날은 일요일 점심이라 긴장을 풀었더니 그날 훈련관의 기분이 나빴던지, 식사시작 구호후 내가 국 한번 뜨고나니 호루라기 소리가 난다. "식사끝!" 으~ 배고파! 그 밖에도 직각식사 하던일, 식판에 머리 박던일, 숟가락 뒤집어서 밥먹으라고 한 훈련관이야기... 천지관은 정말 배고픈 우리들에게 고도의 관심을 만들어 내던 장소였다. ▲Top
    구보와 선착순의 차이
    사관학교 생도들은 4년동안 교육을 받고 장교가 되지만, 우리들은 14주만의 훈련으로 그 들과 같은 장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훈련과 교육은 몇 배로 맹렬했다. 우선 기초체력! 무조건 구보였다. 아직 발에 길들여지지 않은 군화(워커)를 신고, 종일 연병장 뛰고, 또 뛰고... 식사시간에도 식사차례 기다리며 뛰고, 선착순하고... 정말 천지관 앞에서의 선착순은 선배때부터 악명이 높았다. 배고픈 사관후보생을 밥이라는 미끼로 그렇게 뛰게 만들다니... 천지관 앞에서 뒤로돌아 정면에 보이는 담을 찍고 돌아 오라 하지만, 정면의 담은 그 넓은 연병장의 저 끝! 이 놈의 선착순. 한 번으로 절대 끝나지 않을테고... 우리들은 뛰어 나갈때 마다 고민했다. 전력질주해서 빨리 들어와서 또 안뛸 것인가? 아님 천천히 뛰어 체력 안배를 할 것인가? 그러다 그 계산이 틀려 전력질주해서 들어 왔건만 다시 뛰어야 하는 날엔, 젠장! 그 날은 정말 죽은 날이다. 선착순은 체력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고통을 주었다. ▲Top
    빵빠레
    글쎄, 이 이야기를 해야만 할까? 며칠이나 지났을까. 곤히 자고 있는데 방송이 흘러 나온다. "총원 그대로 들어 사관후보생총원 8,9병사 사이에 집합. 복장은 팬티에 슬리퍼..." 그리고 병사의 동문이 열리며 빨간모자의 훈련관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워커발로 침상에 올라 아직 상황파악을 못하고 주위를 살피는 후보생들을 걷어차 밖으로 내몬다. '아! 올것이 왔구나.' 임관한 해암선배들로 부터 귀아프게 듣던 빵빠레! 팬티만 입고, 슬리퍼 신은 우리들에게 진해의 바닷바람은 정말 살인적이었다. 인원점검하고 양팔간격으로 간격을 넓힌후 우선 체온을 내린다. "팔벌려, 다리벌려, 손가락벌려, 입벌려" 공기와 닿는 면적과 발열량은 비례한다던가? 우리들의 체온은 아직 겨울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바닷바람에 하염없이 내려갔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이어지는 기합. 푸쉬업, PT체조... 그것도 모자라면 세숫대야에 물 떠와 뿌린다. 소화전이 없던것이 다행이다. 이것이 장교들의 훈련이었다. 지금도 그 때 추위를 피해 껴안던 동기의 몸내음이 나는 듯 하다. ▲Top
    자기 무덤파기
    지금도 바람부는 날 진해 기초교생각을 하면 '사각,사각...' 희욱이의 밤새 무덤파던 소리가 바람결에 들리는듯하다. 예전 기초교 훈련시절 큰 과실을 한 사관후보생은 '무덤파기'라는 벌을 받게 되었다. 우리가 주로 훈련받던 연병장 건너 바닷가 철조망 밑에는 그 당시에도 선배들이 파 두었다는 무덤의 흔적이 적지않게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리 기수에도 이 무덤을 파던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자기 무덤을 파고 다시 묻는것을 영화에서도 보았지만, 무덤을 팔 수 있도록 삽이라도 주어야 할것아닌가? 그러나 삽대신 무덤팔 이에게 주어진 '삽'은 천지관 식당에서 우리가 식사 할때 사용하던, 앞부분에 포크 2가닥 달린 숟가락이었다. 물론 그것으로 밤새 땅을 파고나면 숟가락 앞부분은 모두 닳아져 못쓰게 되고 만다. 어떤 꾀많던 동기생은 한밤중에 땅 파다 말고 몰래 천지관으로 가서 숟가락대신 주걱을 가져와 땅을 파다가 혼나곤하였다. 물론 주걱역시 닳아서 흉칙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때 희욱이는 야간 동초 -육군에서는 불침번이라고 하는 임무인것 같다.-를 서다가 함께 서던 모 동기생의 유혹으로 잠시 침상에 누웠다가. 훈련관에게 적발되어 매우 특별한 경우라며 바닷가가 아닌 8,9병사 사이에서 무덤을 팠다. 밤새 '사각, 사각...' 그런데, 8,9병사 사이 땅이 수 십년간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밟혀 다져지고, 최근엔 우리들의 밤낮을 가리지 않는 체력단력(?)으로 더더욱 단단히 다져지다 보니, 밤새워 파도 겨우 한뼘도 파지 못하였다.
    지금도 희욱은 그때 이야기를 하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분함을 참지 못하고, 밤에 동원이가 몰래 가져다 주었던 건빵맛 역시 잊지 못한단다. ▲Top
    지옥주
    우리 사관후보생은 3개 중대였다. 1,2중대는 해군사관후보생 3중대는 해병간부후보생. 그리고 각중대는 소대별로 구성되고, 각 소대장 사관후보생과 중대장, 대대장 사관후보생이 1주일간격으로 새로 뽑혔었는데, 참 감투란 곤역이었다. 군중속에 평안(平安)인가? 대오속에 있으면 웬만한 불호령은 없다. 혼나도 다같이 혼나니까... 하지만 소대장부터는 다르다. 열 맨 앞에서 단위부대를 지휘한다는것은 작은 실수도 바로 워커발이 등짝에 날아 올 일이었다.
    훈련과정은 복종주, 극기주, 명예주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난 훈련이 가장 피크인 극기주중 지옥주의 대대장 사관후보생이었다. 경례구호도 '지옥!' 훈련의 목적은 가장 극한상황까지 사람을 몰고 가는것이다. 한마디로 안먹이고, 안재우고, 훈련만 시킨다는것인데 난 하필 그런 주에 대대장을 맡아 6백여명의 대표가 되었다. 그래서인가 그 한 주는 극도로 긴장되었다. 내 생애 그렇게 긴장하여 보낸 시간은 없었을것이다. 스트레스가 아닌 긴장감... 내가 잘하면 6백 여명이 편안하고, 내가 잘못하면 훈련빨리 끝내고 조금이라 쉴 수 있는것을 시간만 끌게된다. 그래서인가 지옥주를 난 빨리 보낸것 같다. ▲Top
    안민고개
    작년 겨울 동기생 김영오와 장윤창의 결혼식이 토,일요일 연속있어 진해로 내려갔다. 내가 두 결혼식의 사회자였기 때문도 있지만, 난 지금까지 동기들의 결혼식에 빠진적이 거의 없다.
    진해에 오랫만에 와서 가고 싶은곳. 이제는 포장된 안민고개를 내 차로 올랐다. 천자봉 행군시 안민고개를 올랐던기억... 지옥주 마지막날 새벽 1시18분에 총기상해서 동틀때까지 안민고개를 올랐던 기억... 첫 외출시 부모님과 함께 안민고개정상에 올라 진해만을 바라보던기억... 감기몸살난 몸으로 야간훈련을 받고 있을때 안민고개를 넘어오던 진해 군항제 행락차량들의 산허리를 둘러싼 전조등 불빛... 연병장에서 올라보던 안민고개 오르막길의 하얀 벚꽃길... 고개정상에서 떠오른 패러글라이더를 보며 미소 짓던일... 참 안민고개는 이름만큼이나 내게 평안함을 주었다. ▲Top
    외출
    꿈같은 외출이었다. 7주일이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닌것 같지만, 그때는 하루가 열흘, 한달 같았으니 7주일 만의 세상구경은 정말 감격이었다. 7주의 기초교육과정이 끝나고 우리들은 부모님과 가족을 모시고 교육사열을 하고서 처음으로 민간인으로 들어왔던 교육사의 문을 사관후보생이라는 군인 신분으로 외출증을 들고 나갔다. 나도 제일 먹고싶던것... 부모님께 커피 한 잔부터 달라고 했다. 언제나 훈련을 위해 숙소와 연병장, 교장을 오갈때면 충용관이던가 그 건물에 있던 커피자판기를 보고 달짝한 자판기 커피 한 잔만 했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부모님과 헤어지고 진해시내를 군복입고 동기들과 거닐고 있으려니 이제는 진정 군인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Top

임관식

임관식을 위한 분열연습은 맹렬했다. 사상 최대인원의 사관후보생들이다 보니 자연히 임관식과 분열을 위한 연습은 많아지고, 우리 88기 동기들은 그 어느해보다 멋지게 해냈다. 임관식에서 난 동기생 대표로 단상에 나가 임관사령장 -해군 소위에 임한다는 내용의 명령서- 과 계급장을 당시 안병태 작전사령관님으로 부터 수여 받았다. 임관식연습이 끝나 동기들은 연병장에서 숙소로 모두 돌아간 다음에도 나를 비롯하여 단상에 올라 상을 받게되는 동기들은 계속 남아 연습을 해야했다. 보행, 뒤로돌아자세, 경례자세 등 일명 군대에서 말하는 자세가 나올때까지 연습해야 했고 나도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당시 입고있던 하근무복의 우측 아랫단이 모두 닳아 버리고 말았었다. 분열이 끝나고 '이것으로...' 하고 행사끝은 알리는 방송이 나올때 우리들은 쓰고 있던 정모를 벗어 하늘 높이 던지며 환호성을 질렀다. 나도 이제 대한민국 해군 장교다. ▲Top

초군반과 첫 부임지

초등군사반인가? 초급군사반인가? 하여튼 6월11일 임관식을 마치고 일주일간의 휴가를 다녀온 후 각 병과별로 교육에 들어갔다. 여기서 부터는 후보생이 아닌 장교의 신분이었기에 예전처럼 그런 훈련은 전혀 없고 영내에서 생활하며 해당 병과의 기초적인 내용을 교육받고 토요일이면 외박을 나가 일요일에 돌아왔었다. 내가 지리산 야간 종주를 한것도 이 시기 주말이다. 초군반이 끝날때쯤 자신들이 처음으로 타러 갈 배를 발표하였다. 함정을 함정번호 순으로 정렬한 후 군번 순으로 배정한것 같다. 난 동우와 함께 2함대 부천함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Top

새벽별 반짝이는 저기 서해에 - 부천함으로 가다.

우리나라는 동,서,남해 3면이 바다인데 동해안은 수심이 깊고 해안선이 단조로워 섬이나 암초가 없고 안개도 많이 끼지않지만, 내가 가게된 서해안은 그와 정 반대라서 배가 항해하기에 여간 까다로운것이 아니다. 인천 앞바다에 가본 이들은 알겠지만 인천에서 바라본 바다는 바다같지 않고 강물 같다. 바로 건너 섬들이 보이니... 수평선이 보이는 넓은 바다까지 나가려면 인천에서 2시간동안 배를 타고 남서쪽으로 나가야한다. 그러니 자연 모항에 들어오는 경우가 적어 출동은 길어지고, 작전이나 항행환경도 나빠 언제나 긴장하게 된다. 더군다나 '99년 연평해전 경우처럼 서해는 북방한계선 NLL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한반도의 화약고이기 때문이다.

    신고와 하정복
    1994년 9월 3일 토요일 초군반수료식을 전투병과학교 잔디밭에서 마치고, 2함대로 부임하는 동기들과 함께 마산역에서 기차타고 영등포역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영등포역에서 너무 서둘러 내리는 바람에 제일 중요한, 당장 내일 신고식때 입어야 할 하정복을 차에 두고 내리고 만 것이다. 택시를 타고 서울역까지 쫓아가 찾고 싶었지만 영등포역앞에 우리를 태우고 인천까지 갈 2함대 버스와 책임장교가 기다리고 있어 난 어쩔 수 없이 정복을 찾지 못한 채 인천으로 갔다.
    처음 인천군항에 들어갔을때는 물때가 만조였던듯 하다. 바지에 정박해 있던 고속정들이 그렇게 크게, 멋있게 보일 수 없었다. 2전단 서해관앞에 집결해 지금 생각하니 전단 인사참모인듯 소령분의 안내로 각자 실습함을 배정 받아 배로 보내졌다. 그렇게 교육을 받고 왔어도 함대에서 2주간의 함상실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천함은 마침 정박중이어서 나와 동우 그리고 부임할 배가 출동중인 동기생 4명과 함께 부천함으로 가서 침실을 배정받고 ROTC 출신인 보수관에게 정복을 빌려 내 명찰을 달았다. 다행히 다음날 신고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지만 난 그 이후로 한동안 정복없이 불안한 생활을 하여야 했다. 아마 바로 10월 동정복을 입는 때가 되어서 그나마 괜찮았던듯 하다. 나중에 진해로 배수리하러 내려갔을때 정복을 새로 맞추었는데 다음해인가 서울역 TMO에서 연락이 와서 잃어버렸던 정복을 찾을 수 있었다. 내 명찰을 보고 본부에 조회하여 내 근무지를 알아 냈단다. 진작에 연락하지... 난 덕분에 하정복이 두 벌이나 되었다. ▲Top
    황천
    황천... 군대가서 황천이라는 말이 죽어서 가는 황천(黃泉)이라는 뜻 외에도 비바람이 심하고 파도가 높은 날씨를 말하는 황천(荒天)이라는 뜻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궂이 단어의 구분이 필요하지 않을듯 하다. 파도가 높아서 배가 심하게 흔들리는 날 배안은 황천(黃泉)과 별 다를것이 없기때문이다. 괴롭다고 놀이공원 바이킹 마냥 그냥 바다로 내릴수도 없는 노릇이고, 싫든 좋든 보름이든 한 달이든 그 배안에서 살아야 하니, 세상 어떤짓을 해도 좋으니 제발 든든한 땅에 발딛고 살고싶다고 이야기가 절로 나올만하다. ▲Top
    어머니 품같은 모항 '진해'
    배라는것이 1년 내내 바다에 띄워두고, 가동할 수 있는것이 아니라서 -특히 군함은 엔진이나 장비가 복잡하고 수리가 힘들어서 예방정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종종 진해로 배를 수리하러 내려간다. 영원한 우리들의 모항 진해... 초기 대한민국 해군은 동서해에 작전기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 진해에서 동서해 전방해역으로 배를 올려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출동일도 길어져 한달, 두달 바다에 떠있어야 했다고 하나, 내가 근무할 당시는 동서해 모항에서 작전하고 가끔 수리 및 훈련차 진해로 내려왔다.
    진해로 수리오면 긴급출항이나, 황천의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휴가도 갈 수 있다. 동해에서 수리하러 내려온 동기들도 오랫만에 만나기도 했고 오랫만에 진해에 근무하고 있는 동기들과 회포를 풀기도 했다.
    하지만 진해생활이 늘 좋은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재박훈련이라고, 배가 해상에서 직접기동하며 훈련하면 많은 경비가 소요되므로 해군은 육상에서 시뮬레이터(Simulator)등 훈련시설을 만들어 놓고 재박중에도 많은 훈련을 한다. 또 훈련만 하는것이 아니라 사전시험이라고 학교 다닐적 보던 시험마냥 시험을 보아야 하는데, 이건 정말 사람을 괴롭힌다. 둘째로 숙소문제가 생긴다. 전방에 있을적엔 배에서 생활하니 큰 문제가 없었지만, 진해 수리중 배에서 산다는 것은 정말 곤욕이다. 우선 냉,난방도 되지 않고, 물도 안 나오고, 화장실도 사용불가해서 육상화장실을 사용해야하고, 시끄럽고, 페인트 냄새나고... 그래서 대부분 BOQ나 방을 얻어 사는데, 이 BOQ -미혼장교숙소-가 모자라다 보니 동기들방에 빈대붙어 살거나, 월세방을 얻어 산다. 셋째는 소비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출동중일때는 물론 돈 쓸일이 별로 없다. 배에도 커피 자판기가 있고 PX도 있어 좀 쓰긴 하지만, 말 그대로 그건 커피값밖에 되지 않고 PX도 출항 2,3일만에 동이나고 말아 소비는 얼마되지 않는다. 오랫만에 인천항에 들어와도 간단히 한 잔하는것 밖에 없지만, 진해에 들어가게 되면, 밥도 많이 사먹게 되고, 휴가도 가고, 오랫만에 동기, 선배들 만나 한 잔, 두 잔 하게 되면 언제나 통장은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그래도 우리들은 늘 진해를 동경하고, 모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다. ▲Top
    야광충
    어느 여름날인가? 하여간 춥지는 않은시기 서해상에서 경비차 항해중이었다. 파도 잔잔한날 야간 당직중 배의 CIC(Central Information Center ; 중앙전투정보실)에서 결재차 함교로 올라갔다가 달빛 하나 없는 바다에서 주변의 바다가 은근히 빛나는것을 보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저게 뭘까?' 달빛이 바다에 부딪혀 빛나는 것일까? 별빛일까? Wing Bridge에 나가보니 흘수선아래 배가 바다에 맞닿는 부분은 더욱 빛나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웠다. 그때는 그저 별빛이 바다에 반사되는 빛이려니 했는데 나중에 책에서 보니, 그것은 바다에 사는 야광충이라는 생물이었다. 뭍에 사는 반딧불마냥 바다에는 야광충이라는 플랭크톤 같은 생물이 빛을 낸다고 한다.
    그 불빛은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움이었다. ▲Top
    돌고래들과 항해
    또하나, 배를 타며 본 장관중의 하나가 돌고래떼이다.
    영화 '프리윌리'인가를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말로만 듣던 수 백 마리의 돌고래떼가 우리 배주위에 나타나서 우리들의 배와 함께 헤엄쳤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어떻게 글로 쓸까... 우리들의 배 바로 옆에서 나란히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는 놈, 멀리서 물위로 뛰어오르며 함께 나가는 놈, 그때 한 놈이 우리들의 배 옆으로 바로 돌진해 들어왔다. 아무래도 부딪치겠다. 저놈은 세상 살기가 싫어 우리배에 부딪혀 자살하려나보다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그놈은 우리배 좌현에서 물속으로 쑥 들어가 우현쪽으로 튀어 나왔다. 정말 대단한 수영 솜씨였다.
    돌고래는 배의 물살을 타며 헤엄치는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동해에서는 돌고래를 자주 본다고 선배들 한테 들었는데 서해에서 돌고래를 본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Top
    장산곶매
    우리배가 종종 있던 백령도 인근 바다에서는 장산곶이 바로 보였다. 아니 보이는 유일한 땅덩어리는 백령도와 장산곶이었다. 내가 부천함에 승조한것이 94년 가을이니까 95년 늦여름의 일인듯 하다. 그때도 우리함은 백령도 인근해상에서 작전중이었는데 태풍이 북상하고 있어 백령도 근해로 피항 - 배가 태풍이나 높은 파도를 피하여 안전한 항구나 수역으로 대피하는 일- 하라는 지시가 함대에서 떨어졌다. 남쪽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태풍이 잘못하면 우리배가 있는곳을 위험반원으로 통과할 지도 모른다고 한다. 우리배는 백령도 근해로 항해하였다. 하늘은 언제 비바람이 불겠는냐는 듯이 아직은 맑고 푸른 초가을 날이었다. 얼마나 갔을까... 백령도로 가까워 질 수록 좌현으로 보이는 장산곶의 위용은 더욱 뚜렷해졌다. 난 당직은 아니었지만, 장산곶과 백령도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함교에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매 한마리가 함수좌현 상공에서 나타나 한 바퀴 선회 하더니 함수우현 Life Line -함정 갑판위에서 인원이나 장비가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매어놓은 Wire줄- 에 내려 앉았다. '장산곶매다!' 언제나 장산곶을 바라볼때마다 장산곶매의 전설을 생각했는데, 바로 저 매가 장산곶매일 것이다. 떨리는 가슴... 한참을 바라보아도 그 놈은 떠오르지 않고 Life Line위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지친 날개를 쉬고 있었다. 난 서둘러 함수쪽 Main 갑판으로 내려갔다. 한 발, 한 발, 조심조심 그 놈 옆으로 다가가도 놈은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날아오르지 않는다. 역시 장산곶매다운 배짱이었다.
    얼마를 마주 보고만 있었을까. 놈은 훌쩍 넓은 날개를 펴 하늘로 솟아올랐다. 새삼 넓어보이는 날개를 편 놈은 유유히 배 뒤쪽으로 날아간다. '중국대륙으로 사냥을 나가나보다.' 난 놈이 떠나간 하늘을 한참이나 바라다 보았다. ▲Top
    해군이라는 꿈의 좌절
    나의 꿈은 해군이었다. 지금도 제대한것이 조금 후회되기는 한다. 하지만 내 해군의 꿈이 최초로 꺽어버리는 사건이 부천함에서 있었다.
    배에서 항해과 장교의 당직 직위는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함장을 대신하여 배를 안전하게 몰며, 담당해역의 경비를 책임지고, 배의 일과를 진행하는 함교 당직사관으로 고참 중위나 대위의 몫이었고, CIC라고 불리는 전투정보실에서 레이다를 보며 배의 위치를 구하고, 담당해역을 감시하며 각종 Sensor를 이용하여 전투정보를 수집, 전시, 평가. 상급자인 함교당직사관에게 권고, 보좌하는 CIC당직사관 일로서 동우나 나같은 소위, 중위의 임무였다. 나도 CIC당직사관으로 하루 8시간 당직을 섰다. 배탄지 1년여 지났을까, 나도 이제는 함교당직사관으로 올라갈때가 되었다. 부장님과 작전관님은 "전정관 너 이제 함교당직서라"하며 출동전 항해당직명령에 나를 함교 견습당직으로 편성하여 함장님께 결재를 올렸다. 그런데, 모든 당직명령서를 아무 말씀없이 결재하시던 함장님이 이번에는 다시 작성하라고 반송하셨다. 작전관님은 다음날인가 나를 그대로 함교견습당직사관으로 올렸고, 결재는 통과되었다.
    출동... 난 작전관님과 함께 오전,오후 8시부터 12시까지 함교에서 함께 당직서며 조함-배를 모는일-에대하여 교육받았다. 그동안 PQS다, 장교기본능력이다, 하며 조함에 대하여 많은 이론공부는 하였지만, 실제 배를 몰고 바다를 항해한적은 없기 때문이다. 한 3일이나 지났을까, 선박검색을 해야할 일이 생겼고, 모든 선박검색시는 보고하라는 함장님의 지시가 있었기에 아침 8시가 갓 지난 이른 아침이지만 함장님께 보고했다. 잠시후, 의아 선박에 대하여 접근하고 있을즈음 함장님께서 함교에 나타나셨다. 함교에 있는 나를 보시더니 놀라시는 눈치다.
    그 날 10시 사관회의시간... Morning Briefing이 끝나고 함장님은 '전정관은 CIC로 다시 내려가라. CIC가 약하다.' 청천벽력이었다. CIC에서 내가 빠져나가 취약해진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항해과 초임장교의 꿈이 그렇듯 나도 조함이 하고 싶었고, 내가 해군에서 커나가는데 함교당직사관은 빨리 거쳐야할 중요한 자리였고 경험이었는데 다시 CIC로 내려가라니...
    회의 끝나고 작전관, 부장님께 하소연도 해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분들도 나를 함교로 올려 보내야만 했지만, 군함에서 함장님의 지시는 절대적이다. 모든 경우를 한 가지의 일로만 평가한다는 것은 그릇된 일이지만, 당시 내게 이 사건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조용히 우현 02deck (2층갑판)으로 나가 바다를 바라보며 혼자 마른 눈물을 삼키며 조용히 외쳤다. '반드시 제대한다!' ▲Top
    그리운 사람들...
    바다... 사람들은 서해바다라고 하면, 어디가도 섬이 보이고 아니면 바로 중국땅이라도 보이는 조그마한 바다인줄 안다. 하지만, 서해도 2시간만 섬사이를 헤집고 나가면 사방이 확 트여 육지라고는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다. 이런 망망대해에서 보름에서 한달간을 육지와는 연락을 완전히 끊고 살다보면 역시 그리워지는 것은 사람이다. 심산유곡에 들어가 살더라도 사람이 그리우면 다시 나오면 될 일이고, 어쩌다 전화니 핸드폰 이라도 될테지만 이놈의 먼 바다는 핸드폰도 안터지고, 그 흔한 TV, FM방송 하나 잡히지 않아 겨우 들을수 있는 방송이라고는 점심시간에 함내 방송으로 틀어주던 AM방송이 전부이니... 세상소식 그립고, 사람이 그리워지기는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핸드폰을 전혀 쓸수 없는것은 아니었다. 가끔 배가 군적-배에서 쓰이는 연료나 식량을 지원함으로 부터 받는일-을 하러 육지 가까이로 다가갈 경우는 가끔 핸드폰도 터지곤 하였으니 이때 우리 '네이비'들은 바빠진다. 여기 저기서 전화하느라 갑판위는 바쁘다. 핸드폰이 없던 나도 육지에 가까운 측방 경비때 우리 부서 부사관한테 전화를 빌려 '육지사람'과 전화를 해보았다. 한 밤중 동쪽하늘은 도시의 불빛 때문인가 환하였고 그것을 바라보며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왜그리 반가운지... 배를 탄다는것은 정말 고독한 직업이었다. ▲Top
    가을은 오는가?
    바다에는 가을이 일찍온다고 한다. 아마 모 대령님이 지은 '바다는 갈매기를...'이라는 책에서 본듯한 내용인데... 당시에는 왜 그런지 말이 나왔는지 몰랐다. 바다에서 가을을 느낄 수 있는것이 무엇이 있길래 그런 말을 하였을까?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지리한 생활속에서도 바람은 차가워지고 하늘은 더욱 맑고 파랗게 변하여만 갔다. 그리고 그 하늘과 맞닿는 바다 역시 더욱 검푸러졌다. 가을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검푸러지는 바다를 보고도 가을이 오고 있다는것을 모르던 나는 항구에 돌아와서 여름내 간직하던 푸르름을 벗고 있는 산하를 보고서야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Top

나만 2함대에 계속 남는다 - 어청도 고속정 부장으로 가다.

'94년 9월경 부천함으로 부임하여 수많은 출동과 훈련으로 정신없이 어느덧 일년이 갔다. 이제 동우를 비롯한 우리 동기생들의 관심은 전출이었다. 3년 근무후 제대하는 동기생들은 이제 육지근무를 할 차례였고, 나와같은 7년 근무 동기생들은 다시 한번 더 배를 타야 할 것 같았다. 기다리던 인사명령은 진해수리중 나왔는데 8전단이란다. 아! 육상근무구나... 하고 감격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였는데, 알고 보니 8전단 근무가 아니라 8전단 소속으로 관리대기중이던 아주 구형 고속정을 전력화 시켜 2함대, 그것도 어청도로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아! 끊이지 않는 운명의 장난이여... 고속정이 211호정인가 부터 시작되어서 375호정까지 나왔는데 내가 가야할 고속정은 221호정이었다. 사관학교 ROTC동기생들을 포함하여 2함대 함정근무하던 94년 임관 동기장교들은 모두 2함대를 떠나 진해나 동해등 다른 함대로 발령이 났다. 나 역시 진해로 발령이 난 셈이지만, 결국은 전력화라는 엄청난 일을 해서 그 배를 끌고 다시 2함대로 올라와야 하는 운명이었던것이다. 남들이 다들 근무하기 싫어하는 2함대로 나는 다시 가야한다. 참수리 221 부장으로...
    관리대기 함정의 전력화
    95년 11월 27일 부천함장님께 인사드리고 옆 부두에 있던 참수리 221정으로 걸어갔다. 관리대기... 관리대기함이란 배가 너무 노후되었으나 아직 퇴역시키기는 아까운 함정들을 전시 대비하여 승조원없이 그냥 부두에 매어 두던 한마디로 죽은배였다. 처음 배로 갔을때 이것은 정말 기가찰 노릇이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70년대 초에 나왔던것 같던 그 배는 장비며 내부 생활환경이며 모든것이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였을때 완전한 비정상이었다. 아니 각 격실은 쓰레기더미 같은것으로 가득차 있었고, 함정 대원들조차 아직 부임해 오지 않아서 몇몇 수병들이 정비과업을 하고 있었다.

    11월 27일 내가 부임하는 날 부터 전력화를 위한 환기훈련이 8전단 주관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부천함의 양해를 얻어 부임전부터 221호정으로 출근하며 일을 하였지만, 이건 정말 너무하였다. 교육훈련을 책임지는 배의 부장이 훈련시작하는 날 부임하도록 인사명령을 내는 것이 어디에 있고, 심지어는 주요 부사관들조차 훈련시작하는 날 충원이 되지 않았으니...

    일반적으로 해군에서 새로운 배를 건조하여 전력화를 시킬때는 정예의 인원들을 배로 보낸다. 수병이든, 부사관이든, 장교든간에... 하지만 우리 221호정의 인원구성은 그 반대였던것같다. 당시 함께 배를 탔던 전우들이 이 글을 보면 기분 나쁠지는 모르지만, 곧 전역할 부사관, 다른 배에서 쫒겨온 부사관등 인원구성을 최악 직전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나중에 알았지만 웬만큼 똑똑한 부사관이나 장교들은 제가 갈 배나 부서를 골라 간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하지만 어청도 고속정은 누구도 가고싶어 하지 않는 그야말로 해군의 무덤이었다. 관리대기함 새로 정비하고 환기훈련하고 나서도 또 어청도 가서 고생할 것을 알면서 이 배로 올 사람이 누가 있는가? 정말 숙련된 뱃사람(Skilled Crew)가 필요한 배이고 시기였지만 해군은 조그마한 고속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Top

    환기훈련
    재미있는 단어선택인것 같다. 환기훈련... 환기훈련은 단위함정훈련의 기본 훈련이다. 당시 2주간 진행되었던 훈련은 각 상황별 인원구성을 하는 Station Bill 작성부터 시작하여 각종 육상,해상훈련을 진해항과 진해만 해상에서 실시하였다. 11~12월의 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정신없는 전투배치, 인명구조, 사격, 소화방수, 화생방, 정밀검색, 퇴함훈련까지 함정으로 있을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때 새삼 느낀것이지만 부천함에서 전투정보관으로 근무하며 많은 재박훈련과 해상경험으로 얻은 지식과 Know-how는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강하고 많은것을 알고 있는 장교만이 강한 배, 싸워서 이길수 있는 부하들을 만들수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힘든 훈련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배운것을 비록 배의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부정장으로서 교육훈련 담당관으로서 부하들과 배의 전투력 향상을 위하여 쓸수 있다는것이 기뻤다. ▲Top
    진해에서 인천까지 뱃길로
    환기 훈련과 2주간의 마무리 수리를 마친 우리배는 '95년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고 인천항을 향해 진해항을 출항하게 되었다. 내가 지리산 청학동에서 출발하여 세석산장에서 자고 천왕봉을 오른 크리스마스가 이때였다. 26일 출발 예정 이었으나 날이 좋지않아 27일 아침에 출발하였다. 부천함 시절 진해항과 인천항사이 뱃길을 많이 다녔으나, 그때는 먼 바닷길로 돌아 다녔고 이번 항해는 남해, 서해의 섬사이를 거쳐가는 위험한 뱃길이었다. 물론 하루면 갈 길도 아니고 취사능력도 없는 배로서 야간항해를 할 수 도 없어 흑산도에서 1박을 할 계획이었다. 진해에서 흑산도까지의 뱃길은 무난하였다. 미리 해도를 보고 수로를 충분히 연구하고 항로선을 해도상에 그어 두었기에 계획된 대로 항해하면 될 일이었는데, 문제는 흑산도에 입항하여 하루를 지낸 다음날이었다. 또 파도가 높아져 배가 흑산도를 나갈 수가 없었다. 하긴 조그마한 고속정으로 이런 겨울에 항해 가능한 날이 얼마나 될까? 하루, 이틀, 사흘... 이틀이면 올라갈 뱃길이 점점 늦어져 그만 흑산도에서 '96년 새해를 맞이하였다. 내일은 갈 수 있을까? 할 일 없이 하루 하루 보내던 흑산도 생활... 앞으로 다가올 어청도 생활의 불안감으로 흑산도의 하루 하루는 정말 괴롭고 길었다. 흑산도 들어온지 8일째되던 96년 1월 4일 드디어 날씨가 좋아지고 흑산도를 출항하여 인천항으로 올라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우리들은 8일간의 항해를 마치고 '96년 1월 4일 오후 드디어 인천항에 입항하였다. ▲Top
    어청도
    於靑島. 아! 푸르른 섬 어청도여...
    어떤 이야기 부터 시작해야 할까? 어청도에 대하여...

    위치? 내가 섬에서 나올때는 쾌속선이 다녀서 2~3시간 거리가 되었지만, 그 전까지는 군산에서 배를 타고 5~6시간을 들어가야 하는 서해 중부해상의 끝섬이다. 볼거리라고는 거의 없으나 낚시꾼들에게는 바위낚시 장소로 잘 알려져 종종 낚시꾼들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정말 꾼이 아니고서야 5~6시간 배를 타고 섬에 들어올 사람이 어디 있으랴... 섬의 크기? 글쎄 매우 작은섬이었다. 산 하나에 항구를 둘러싼 마을하나, 초등학교 하나 있고, 우체국 하나 있고, 슈퍼마켓 3~4군데, 교회 둘, 보건소 하나, 식당 몇개, 공중전화 단 2대... 아! 그리고 우리들이 굉장히 애용하던 중국집 만리장성! 나머지는 온통 다방뿐이었다.

    비록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지만 어청도는 고래잡이가 금지되기 전까지는 동해의 장승포항과 더불어 고래잡이의 전초기지로서 굉장히 흥청대던 섬이었고, 내가 근무할 당시도 예전만 못하더라도 외딴섬 답지않게 물때가 좋을때면 많은 어선들이 찾아와 성시를 이루던 곳이다. 그러니 자연히 많아지는 것은 술집과 여자이다. 하지만 방금 이야기 했지만 어청도에는 술집이 없었다. 다만 많은 다방만 있을뿐... 이 다방들은 낮에는 손님들에게 차를 파는 찻집이지만, 밤만되면 술집으로, 노래방으로, 단란주점으로 변한다. 당시 맥주 작은병 한 박스가 12만원 하다가, 내가 섬에서 나오던 '97년쯤은 15만원까지 올랐으니, 결코 싼 술값은 아니었다. 고기가 잡히지 않고 배가 없을때면 이 다방(?)들은 조용하지만 항구에 고깃배가 들어오고 산고배-어물운반선, 어청도나 주변 해상 어선에서 갓잡은 생선을 사서 군산이나 장항 어시장에 내다 파는 중간상인배-를 만나 흥정이 끝나는 날이면 항구의 다방들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었다.

    어청도 산에 오르면 봉화대가 있었는데 아마도 예전에 서해상으로 들어오는 왜구나 적군을 감시하던 곳인듯하다. 동쪽에 있는 연도와 연결되는 봉화라고 한다. 그리고 어청도에 가면 꼭 들러야 할곳이 있다. 항구에서 마을과 초등학교를 지나 조그마한 언덕을 넘으면 보기에도 외로운 등대 하나와 관리소가 있는데, 참 그곳의 경치가 아름다웠다. 내가 야간 항해나 경비때에도 애 타게 찾던 어청도 등대... 서해를 지나는 많은 상선과 어선들에게 길잡이가 되어준다.

    섬은 'ㄷ'자를 시계방향으로 90도 돌려 놓은듯한 모습으로 마치 여자가 옆으로 웅크리고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듣고 섬의 모양을 유심히 쳐다보고 해도를 들여다 보아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한 두달 지난후 우연히 우리배의 레이다 스코프에 비친 섬의 모습을 보다 그 말이 맞음을 알게 되었다. 그 웅크리고 누워있는 여자의 음부부분에 섬의 유일한 저수지가 있다. 여자의 음부 부분에서 물이 솟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그런 강한 여성의 기운 때문인가? 함대에서 가끔 경비 지원차 내려오던 신형 고속정들도 전방해역에서 씽씽 잘 달리다가도 어청도에만 들어오면 꼭 장비 고장이나 크고 작은 사고가 나고는 하였다. 뱃사람들은 부정을 탄다하여 배에 여자를 태우지 않는 관습이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데 그렇게 여자의 품안에 배가 들어오니 부정타서 고장이 나는것이 당연하지 않냐며 투덜대던 어느 정장의 말이 생각난다. ▲Top
    밀입국과 특별경비
    IMF이후 부터는 뜸해졌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 경기는 호황이었고, 이에 편승하여 한 몫 잡아보겠다고 중국에서 몰래 밀입국하던 조선족 동포가 많았다. 낡은 고깃배의 좁은 어창-잡은 생선을 보관하는 배의 창고-에 몇 수십명씩 몸을 숨키고 서해안에 몰래 들어오거나 해상에서 우리 어선을 만나 옮겨 타고는 하였는데, 본래 밀입국 어선을 단속하는 것은 해경의 소임이지만 밀입국을 가장한 불순세력의 잠입또한 간과할 수 없고, 바다에서 확인되지 않은 선박이 육지로 들어가는것을 두고 볼수 없는 일이라 밀입국 선박을 잡는 일에 해군은 열심이었다. 그래서, 7,80년대에 시행되던 고속정 야간 경비가 우리배가 어청도로 들어가기 얼마 전부터 다시 시행되어 밤 9시가 넘어 출항하여 바다에서 경비하다 동틀녘이 되어서야 섬으로 돌아와 쉬고는 하였다. 전에 근무하던 부천함과 달리 고속정은 너무도 작고, 인원도 적어 오랜시간 당직교대근무가 불가능하고,숙식시설 또한 취약하여 바다에서 오랜시간 작전을 할 수가 없다.

    어려운 야간경비지만 이렇게 야간경비만 하면 그래도 견딜만 하겠지만, 중국에서 밀입국 선박이 들어온다는 첩보가 있을때면 특별경비라 하여 2교대로 하루 12시간 이상 바다에 떠있어야 했다. 특별경비가 적을때는 한달에 열흘 정도 많을때는 25일까지 있었으니 섬에서의 나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배가 정박하던 바지에서 식당과 숙소가 있는 기지 까지는 산길을 헉헉거리며 한참을 올라가야 있어 밥먹으러 갈때나 화장실 한번 가려면 여간 힘든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너무나 많은 경비와 긴급출항으로 정장님을 제외한 모든 대원들은 배에서 지냈으니 밀입국이다... 함대 기동훈련이다... 바쁘고, 날이 가물어 기지에 물이 없어 제한급수를 할 때에는 일 주일간을 씻지 못하고 지낸적도 있고, 하루종일 컵라면만 먹고 지난적도 있다. 우리배의 어느 부사관은 양치질할 물이 없자 슈퍼에서 물을 사가지고 양치질을 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2달을 지내야 4주일간의 수리와 재박훈련을 위하여 인천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때 절실히 느낀것이지만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사람일수록 자신의 이익과 편안만을 생각하지 자신이 거느린 조직의 말단 조직원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먹고 있는지 통관심이 없었던것 같다. 못먹고 못자던 시절... 그러나 함대와 전대에서는 끊임없이 경비하고, 검색하고, 훈련하기만을 지시하였다. 항상 피곤하고, 배고프고, 스트레스 받고, 뭍의 사람들이 그리운, 너무 힘든 시절이었다. ▲Top

    아름다운 조국 - 지는 해를 보며 눈물 흘린적이 있는가?
    그렇게 힘든 시절이었지만, 견딜수 있던것은 동거동락 하며 힘든 섬생활을 잘견디며 자신의 임무를 너무나 충실히 수행해 주던 우리 천진난만한 수병들과 '부장님 부장님' 하며 잘따라 주던 부사관들과 함께 있어서였던것 같다. 그리고 또하나 조국의 바다를 내가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이 또한 나를 견디게 하였다. 그때도 특별경비와 훈련이 겹쳐있던 때였던것 같다. 경비와 훈련을 마친 우리 참수리 221정은 어청도로 입항하려고 가진서를 통과하여 방파제 근처에서 잠시 대기 하고 있었다. 함교 Open Bridge에서 정장님이던 효식선배와 함께 Headset을 쓰고 입항을 기다리고 있다가 무심코 왼쪽으로 고개돌려 바라본 석양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바다에 걸린 노란 태양 주위로 붉게 불타는 하늘과 검푸른 바다... 순간 가슴속이 뭉클하더니 눈가에 뜨거운것이 괴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조국이다." 혼자 조용히 속삭였다. ▲Top
    마지막 경비작전에서 드디어 사고치다.
    내일 모레면 나도 객선을 타고 이 섬을 나간다는 기쁜 마음과 더불어 싫든 좋든 정든 배와 대원들 곁을 떠나야 한다는 찹찹한 마음이 교차하는 밤이었다. 조타실에서 앉아 북쪽을 향해 RPM 800의 저속으로 경비중이었는데, 보름이 얼마 남지않았는지 하늘의 달은 밝고, 파도도 높지 않았다. 별다른 접촉물도 없고 매우 평온한 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관실쪽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순간 Skilled Seaman의 감각으로 '앗! 무슨일인가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현정지!' 조타실 반대편에 앉아 스로틀을 잡고 있던 기관장이 급히 배를 정지시킨다. 나는 급히 기관실로 뛰어 내려갔지만, 당직서던 기관병이 졸린눈으로 나와서 인사할 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다시 Open Bridge로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역시 이상없다. 배가 어디 부딪힌것도, 누가와서 우리배를 들이받은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런 소리가 났을까? 함교의 견시병-배의 안전항해를 위하여 시각, 청각 감시하는 임무- 역시 아무것도 못보았단다.
    순간, 더욱 불안안 감이 뇌리를 스치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 렌턴을 들고 함미쪽으로 가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스크류부분 아랫쪽으로 커다란 폐어망이 걸려있는것이 흘수선 아래로 보인다. 좌현 우현 모두걸린 것이다.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 했던가? 이 무슨 변고란 말인다. 배는 전혀 기동할 수 없었다. 정장님은 어망이 더 감길수 있다고 엔진을 쓰지 않기로 하였다. 탁월한 판단이었다. 우리는 전대에 사고보고를 하였고, 잠시후 남쪽에서 경비중이던 또다른 고속정에게 우리배를 예인해서 어청도로 복귀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예인선이 오기전까지 스쿠류에 걸려 바다에 떠다니는 폐어망의 나머지 부분을 끌어 갑판으로 끌어올려야 했다. 예인선이 다가와서 그 배마저 걸릴수 있고, 예인중 또 어떤일이 일어날지 모르기때문인데, 어망은 정총원이 끌어당겨도 끝없이 끝없이 올라와 결국에 함미 갑판을 가득 채웠다. 한 두 시간이 지났을까 나의 다정한 동기 효근이가 부장으로 있는 316호정이 남쪽에서 나타났고, 우리는 피예인 요원을 배치하여 예인 준비를 마쳤다. 섬을 향해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동안 동이 튼다. 가진서 근처에 도착하였을때는 완전히 날이 밝았고 우리배를 접안시키고자 LCM이 대기하고 있었다. 316호정과의 함수미 예인에서 LCM과의 현측예인으로 변경하여 어청도 바지에 접안하였다.

    이제는 어망을 치우는 일이 문제다. 전대에는 잠수사가 없고 함대에서 내려오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섬의 잠수부를 사서 어망을 제거하고 나머지 부분까지 건져올려 바지에 늘어 놓았더니 도교를 지나 육상까지 이어지는 장장 200여 미터의 폐어망이었다. 이놈이 수면 아래 1미터쯤 떠 있으니 어찌 보름달이 밝다한들 이를 볼 수 있겠나... 전대나 함대에서도 사고의 불가항력을 알고 질책이 없었다. 우리는 수백만원 한다는 어망을 관리 못하고 잃어버린 어부만을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어망을 제거하고 시운전결과 배의 진동이 심하다. 아무래도 스크류의 Blade에 손상이 온것 같다. 그 날 오후인가, 다음날 아침인가 우리배는 인천으로 긴급수리차 올라왔고, 난 인천도착후 바로 동해로 전출차 이함 하였다. ▲Top

1년6개월의 고속정생활을 마치고 동해로 간다.

내가 참수리 221정에 온지도 1년 6개월이 다 되어갈 무렵... 또다시 나는 인사명령전보에 잔득 신경을쓰기 시작하였다. 규정상 함상근무를 18개월이상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발령날 때가 되었기 때문인데 아니나 다를까 18개월에서 하루 빠지는 날 1함대 전비전대 작전관으로 가도록 인사명령이 나왔다. 그동안 각각 두분의 전대장,편대장,정장님을 모시고 3명의 기관장과 근무를 하였다. 그 사람들이 섬에서 객선을 타고 나갈때면 언제나 짐을 들어주고 손을 흔들어 주며 언제나 나도 저렇게 섬을 나갈 수 있을까 하였는데 이제 내 차례가 온것이다.
    내 고향 동해
    동해시는 내 고향이다. 소위 임관후 동해로 배치받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으나 마음대로 되지는 않아 반대편 인천쪽에서 3년을 보내다가 이제서야 동해로 간다. 그다지 좋지않은 일을 저지르고 참수리 221호정에서 떠났지만 이제는 배를 타지 않고 육상근무를 한다는 생각과 내 고향 동해로 근무하러 간다는 생각에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는 내 마음은 비오는 날씨와 아랑곳 없이 즐겁기만 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때 떠난 고향이지만 언제나 마음속으로는 고향 묵호를 동경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고향땅에 군인으로, 해군 장교로서 다시 찾아가는 것이다. ▲Top
    난 먼저 산으로 간다.
    첫날은 전임자인 동기생 김홍래의 BOQ에서 묵었다. 2인 1실의 숙소였는데 마침 나머지 한 침대가 비어 있었기에 앞으로도 그 방을 홍래와 계속 쓰기로 입사신청을 하였다. 전대장님께 전입신고하고, 홍래에게 업무 인수받고... 홍래는 3년 복무였기 때문에 다음달 6월에 제대하였다. 그의 후임으로 동기생인 내가 온것이었다. 육상근무는 정말 환상이었다. 5시가 넘으면 퇴근해서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고, 긴급출항도, 선박검색도, 황천도 없다. 배를 탈때에도 휴가때면 다른 짓을 생각할 것도 없이 산으로 달려가 산에만 매달려 있다가 돌아오고는 했었는데 이제 육상근무이니 산에 실컷 갈 수 있게 되었다. 첫 주말 토요일 난 홍래를 꼬셔서 두타산으로 갔고, 다음날 일요일은 태백산에 다녀왔다.
    난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 ▲Top
    109전대 작전관과 PQS
    내가 소속된 전비전대는 함대의 교육,훈련,점검을 주관하던 부대였다. 그 부대의 정작참모실 작전관으로 난 각종 교육,훈련,점검계획을 기획, 조정하는 업무와 함대 소속 항해, 기관과 초임장교들의 장교능력평가 -PQS; Personnel Qualification Standards-를 집행하는 임무가 있었는데, 함정의 훈련계획을 조정하는것은 머리아프고 복잡한 일이더라도 수월하게 해 낼수 있었는데 이놈의 PQS는 정말 골치였다. 나도 소위 중위때 PQS보느라고 너무나 고생하였는데 대위 진급해서는 내가 PQS를 집행하느라 고생하게 되었다.

    소위때 보는 1단계는 항해, 기관, 정박, 정신전력, 일반보수, 분대장 모두 6과목이었고, 중위때와 1,2급함 부서장이 보는 2단계는 전술과 함통제 2과목이었는데 함대나 작전사령부에서 PQS 조기합격에 대한 관심이 많아 함정장과 부장들의 압력이 심하였다.
    분명 전비지침서 규정에는 1회 시험후 불합격시 2주후 다시 시험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으나 군대에서 하는 말로 좀 끝발있다는 1급함 근무 장교들은 시험후 바로 채점해 달라고 서있거나 불합격하면 다음날 다시 시험보러 오고는 하였다. 물론 어청도 근무시 규정과 절차를 무시하고 인맥과 변칙으로 일을 처리하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힘없고 권력과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피해와 고통을 당하는가를 몸소 절실히 느낀 나는 이를 절대 용납하지 않고 따끔한 훈계와 함께 바로 돌아보냈다. 그럼 얼마후 배에서 전화가 내게 걸려온다. 처음에는 대위 Level에서 전화가 와서 왜 시험을 못보게 하느냐고 따진다. 그럼 난 또다시 규정과 이를 어길때 다른 사람들의 피해를 이야기 하고 통화를 끝내면 잠시후는 소령이나 중령 Level에서 전화가 온다. 심한경우는 욕설부터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절대 굴할 수 는 없었다. 부천함과 어청도 고속정에서 강하고 많이 아는 장교만이 부하를 훌륭히 지휘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수 있고, 규정과 절차를 지키지 않고 일을 처리하면 그 당사자는 편하지만 누군가는 피해를 보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몸소 느낀나는 절대 굴할수 없었다. 아마 내가 장기복무하기로 마음먹었으면 그렇게 못했을지 모른다. 나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야만 하니... 전화를 끊고나면 잠시후 이번에는 참모님 한테 인터폰이 온다. '야, 그 OO함 말이야. 그거 해줘!' 늘 그런식이다. 두분의 참모를 모셨는데 첫 참모님은 늘 그런식이었고, 두번째 참모님은 '야, 작전관 니가 알아서 해!'하고 내편이 되어 주셨다.

    후배들도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왜 규정과 절차를 지켜야만 하는지 그리고 왜 장교가 공부를 해야하는지 이야기 하면 그들은 이해하고 나를 따라주었다. 참, 나도 고지식 했던것 같지만 후회는 안한다. 아니 참 잘한 일인것 같다. 1년쯤 지났을까 느닷없이 8전단에서 PQS확인 검열을 올라왔는데, 규정대로 PQS를 집행하고 있는지, 합격장교들의 실력이 정말 합격수준인지 검열하였다. Excel File로 모든 시험 응시현황, 점수, 합격현황을 유지하고 있던 나는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장교들의 실력도 우수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나의 노력이 보람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Top

    미항모 인디펜던스에 함재기를 타고 들어가다.
    해군 복무하며 많은 훈련을 다녔다. 특히 109전대 작전관 시절에는 연간 훈련파견일수가 2개월 가량 되었다. War Game, 해상훈련관찰, 호국,을지훈련... 그중에서 특히 기억이 남는것이 '97년 10월 27일 부터 11월 1일까지 동해에서 Foal-eagle 훈련중이던 항공모함 CV-62 인디펜던스함에 한국해군 연락장교로 파견간 것이다. 26일 자정경 동해 시외버스 터미날에서 부산가는 야간 시외버스를 타고 김해공항으로 갔다. 거기서 함께 항모로 들어갈 장교 2명을 더 만나 '인디'의 함재기인 C-2 수송기를 타고 부산을 이륙하였다. 수송기 창가에 앉은 나는 -나올때 알았지만 수송기의 창문은 2군데 밖에 없었다.- 그림같이 펼쳐지는 동해를 볼수 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저 밑에 점같이 보이는 항모를 선회하던 C-2기는 고도를 낮추더니 가벼운 충격과 함께 급정지한다. 창밖 풍경은 바다와 하늘이 아닌 인디의 갑판상으로 여러대의 전투기와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로 변해 있었다.

    항모 '인디'는 섬이었다. 거친 바다였지만 항모는 거의 미동도 않아 여기가 배인지 섬인지 모르겠다. 훈련 몇일째인가 한국군 육군 4성 장군과 미 7함대 사령관이 배를 방문하였고, 미 7함대 소속 함정과 함재기들의 시범훈련이 있었다. 항공기의 이착륙, 공중사격, 공중급유... '인디'관제탑에서 훈련을 지켜보고 있는데 좌현 함미쪽에서 배 두척이 온다. 한 척은 미함 DD나 FF였고, 한척은 우리 고속정인 듯 했다. '아 우리 고속정이 이 먼바다까지 나오다니!'하고 감격하고 있는데, 잠시후 가까이 다가온 두척은 미함과 우리 해군의 주력함 한국형 구축함 -전남함이었던듯하다-이었다. 당시 광개토대왕함이 나오기전까지는 강원함 Class와 함께 해군의 주력함이 었지만, 미함과 나란히 항해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고속정이었다. 항모는 전혀 미동도 않고 미함은 약간 출렁이지만 대한민국 해군의 주력함은 난리도 아니다. 출렁출렁~ 잠시후 두척의 군함에서 함포 사격시범을 하였고 옆에서 보고 있던 미군 장교가 내게 "Oh! Korea navy top gun!" 하며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비아냥거린다. 정말 우리해군이 사격을 잘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함포전의 시대는 갔는데 아직 함포가 주력무기냐는 뜻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난 아무말없이 웃고 말았지만 참 씁쓸했다.

    '인디'에는 5천명이 넘는 군인들이 승조해 있었는데 그중 절반이 함정사람이고, 나머지 절반이 비행단 사람이었다. 배에는 많은 침실과 식당, PX, 우체국, 병원이 있어 하나의 조그마한 도시였다. Flight-deck이라 불리는 비행갑판이 main갑판인줄 알았더니 3~4층의 O3인가 04 deck였고, 함재기를 수리하고, 격납해두던 Hangar bay가 main deck였다. Hanger bay에서는 수백명의 군인들이 비행기를 정비중이고 Flight deck에서는 무기를 적재하고, 출격준비를 하고, 점검하는 사람들로 붐비었다. 수 백명의 사람들과 수 십대의 비행기가 Hanger bay와 Flight deck에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이 신기하였다. 이를 위하여 지휘부에서는 매일 정교한 비행계획과 일과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난 미항모 전단과 한국해군의 연락임무를 맡아 전단의 지휘부에서 근무하였는데, 그 들은 조기경보기를 이용하여 조그마한 어선을 포함한 동해상의 모든 선박의 정보를 수집하고 위성통신을 이용하여 본국 및 한국에 파견된 연락장교와 바로 전화통화 및 mail 송수신을 하였다. 정말 대단한 정보 수집력과 장비들이었다. 새삼 한국해군이 아직 얼마나 낙후되어 있는가를 절실히 느끼었다.

    미군의 사회도 철저한 계급조직이어서 계급별로 생활 Sector가 철저히 구분되어 있었다. 계급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침실, 화장실, 식당이 구분되어 있었다. 나를 비롯한 파견장교들과 교환근무장교들은 항모전단 지휘부 장교들과 함께 전단장 Moore제독- Commander, Carrier Group FIVE, RADM(해군소장)-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 주방장이 백악관 조리실에서 근무하던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음식솜씨가 일품이었다. 매 저녁식사는 촛불을 켜고 하는 정식 만찬으로 나를 비롯한 위관장교들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때면 배의 일반 장교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거기서 미 해군에 근무중인 교포 2세들을 몇 만날수 있었으며, 이들에게 항모생활에 대하여 많이 들을 수 있었고, 몇몇 군데를 안내 받아 더 구경할 수 있었으나, 내가 보고싶던 기관실만은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항모 어디를 가도 근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임무에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었다.

    할로윈데이가 지난 11월 1일 아침... 우리들은 항모'인디'에 들어올때 타고왔던 C-2수송기를 타고 부산 김해공항으로 나왔다. 파견근무가 끝난것이다. 이륙을 위하여 안전밸트를 매자 함재기는 천천히 이동하였다. 아마 캐터펄트(Catapult)에 함재기가 끼워지나보다. 100m도 안되는 짧은 거리에서 이륙하기 위하여 항모는 이륙시 풍상쪽으로 항해 하고, 비행기는 캐터펄트에 끼워져 1~2초의 짧은 시간에 이륙에 필요한 속도(165KTS; 시속 약300km/h)까지 증속되었다. 캐터펄트는 항모 갑판에 부착되어 강한 증기압으로 순간 높은 속도로 비행기를 항모 앞쪽으로 밀어낸다. 그때의 순간 충격은 대단한것이었다. C-2수송기의 좌석은 비행방향 뒷편을 보도록 놓여져 있었는데 X모양으로 안전밸트를 매지 않았으면 아마 내 몸은 비행기 뒷편에 달라 붙었을 것이다. 함재기의 제트 엔진 소음이 점점높아지더니 순간 앞으로 달려나가 어느새 하늘을 날고 있었다. ▲Top

아산만기지 건설사업단

동해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근무하였지만, 세월은 참 빨리갔다. PQS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많은 훈련 파견이 있기는 했어도 첫 육상근무였고, 고향에서의 근무였기 때문인지 참으로 재미있고 편안한 세월이었다. 다음 보직은 반드시 고속정 정장으로 가고싶어 벼르고 있었는데 고속정 정장선발에 누락되었다. 참모님이 본부에 전화해서 물어 보았더니 장기 복무자가 아니면 정장 보직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난 7년 복무하기로 되어 있어 단기근무 장교로 분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본부 인사에서 전화가 왔다.
    떠나기 싫지만
    나를 아산만 기지건설 사업단으로 보내겠다는 것이다. 참모님은 나를 보내기 싫어 전대장님께 보고하고, 본부에 다시 전화도 해보았지만 어쩔수 없단다. 나도 동해에서 계속 고속정 정장을하고 싶었지 육상근무는 하기는 싫었으나, 상부의 명령인지라 21개월의 동해 생활을 접고 나의 차 Pride에 한 가득 짐을 싣고 '99년 2월 동해를 떠났다. 서울집에서 하루 자고 간단히 짐을 챙겨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사업단에 도착했을때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고, 부대는 공사장의 가건물이었다. 아산만기지건설사업단에서 나의 보직은 계획보좌관으로 국방력개선사업 계획통제 보좌와 부대 인사, 정보, 작전임무였다. 원래 소령보직 직책이었으나 전임자가 함정으로 전출가는 바람에 대위이던 나를 급하게 보낸것이다. ▲Top
    역시 뱃놈은 배 타는것이 가장 편하다.
    어청도 근무할때 전대장님께서 가끔하시던 말씀인데 그때는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사업단근무하며 그 말뜻을 절실히 느꼈다. 사업단에서는 밤 8시까지 연장과업을 하고 있었다. 사업막바지라 바쁘고 부대내에서 무엇인가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그랬는데 12월 20일 해체할까 보니까 내가 2월에 부임해서 12월 부대해체시까지 2/3정도는 연장과업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뭐 중요하겠는가? 사업 막바지에 난 일요일은 물론 새벽1~2시까지 일하거나 밤새워 일하던일이 비일비재 했다. 부대해체와 많은 보고서 작성, 컴퓨터를 이용한 Presentation작성 때문인데, 설상가상으로 부대해체 직전이라 함께 일하던 사람을 빼가기만 하지 나를 마지막으로 채워주지는 않아 할 일은 점점 늘어나 나중에는 소령 2인, 대위 1인, 총3인의 일을 혼자하게 되었으니 바쁠 수밖에...
    한 밤중에 일하다 나와서 바다를 보며 생각했다. '아! 배타고싶다.' ▲Top
    동네가게에서 프린터 잉크를 훔치다.
    해군 참모총장님께 사업단장님이 업무보고를 드리기로 계획되어 있는데, 그 보고서를 Power Point로 작성한 후, 컬러 프린터로 출력하란다. 하지만, 사업단에는 그런 작업을 할 만한 컴퓨터도 프린터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내 CPU 166MHz의 낡은 컴퓨터와 프린터로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 많은 사진을 찍고, 내 스캐너로 스캔하고, 작업하고, 프린트하고... 그런데 프린트 품질을 최고로 하다보니 인쇄 시간이 많이걸렸다. 오후 늦게까지 수정의 수정을 거듭하다 저녁부터 시작한 출력은 벌써 밤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내일 새벽 5시에 단장님께서 대전 계룡대로 출발하실때 드리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끝날지 모르겠다. 그런데 밤 11시를 좀 넘기자 출력물의 색이 이상해지기 시작하였다. 앗! 프린터 컬러 잉크가 다 된것이다. 정말 낭패다. 다른 잉크도 없고, 가게도 당연히 문을 닫을 시간이고, 공사장 한 복판에서 어디가서 잉크를 구한다 말인가? 우선은 주변사람들에게 전화해서 다른 프린터나 잉크가 있는지 수소문 해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렇다고 평택시내 PC방에 가서 프린트하기에는 우선 File의 용량이 너무 크고, 보안상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급히 15분거리에 있는 문구센타로 차를 몰고 가보았지만 역시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벌써 문을 닫았던것이다. 간판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도 빈 가게에서 요란히 벨이 울릴뿐... 포기하고 돌아서려다 가게 뒷쪽으로 가보았더니 문이 하나 있었다. 혹시하는 마음으로 열어보았더니 아뿔사 열린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조용히 조용히 가게로 잠입(?)한다. 평소에도 많이 오던곳이라 좀 어두워도 내가 쓰는 잉크가 있는곳으로 정확히 찾아갈 수 있었다. 잉크를 하나 들고 조용히 되돌아 나왔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우선은 대성공이었다. 급히 돌아와 출력을 새벽 4시경 마칠 수 있었고, 5시 좀 넘긴 시각에 단장님과 실장님을 만나 보고서를 드렸다.
    그날 오전에 그 문구쎈타 직원이 찾아 왔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라 농으로 뭐 없어진 물건 없냐고 물었더니 없단다. 웃으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잉크값을 주었더니 문 열려 있었다는 이야기 절대 사장한테 하지마라며 몇 천원 빼준다. ▲Top
    정든 수병들, 동료들과 헤어지고...
    사업 막바지에 이르자 정말 정신없이 바빠진다. 특히 많은 외부 손님의 방문으로 더욱 바빴는데 그 때마다 일일이 행사계획까지 세워 집행하는 것이 여간 신경많이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느덧 세월은 흘러 아산만기지로 기지가 점점 푸르게 변하고, 배가 들어오고, 함대가 이전하는 모습을 바라보니 내가 이 일을 해냈구나 하는 뿌듯한 마음에 힘이 절로 났다. 12월 20일 9년간의 긴 공사를 마치고 사업단이 해체되었다. 그 전날 사업단장님은 가족들도 모두 모인 송별파티 -송별파티라고 거창한것이 아니었다. 그저 우리가 쓰던 가건물 식당에서 돼지 삼겹살에 소주가 전부였다.-에서 나를 '월화수목금토일'이라 소개한다. 쉬는날 없이 일만하는 놈이라는 뜻이란다. 난 속으로 씁쓸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잠시후 조용히 식당을 빠져나와 난방도 되지 않는 사무실로 되 돌아왔다. 아직 할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데 부대가 해체되려니 사무집기며, 장비, 비품, 통신기, 컴퓨터, 비밀문건등 반납해야할 물건들을 처리하는 일이 해도 해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함께 해야할 보급관과 기관과 보좌관이 벌써 몇달전에 전출가거나 전역해서 나의 일은 더욱 많았다.
    다음날 12월 20일 사업단 해체식도 그동안 이룬 일에 비하여 너무나 초라했다. 어제의 그 식당에서 자체행사로 끝났다. 모든 사람들을 떠나 보내고 정든 수병들과도 헤어져 각자 새로운 부임지로 보냈다. 자칭 『아산만 최후의 용사들』이라던 우리 수병들과 힘든 일도 참 잘따라 주던 우리 부사관들이 보고싶다. ▲Top

2함대 화학대

'99년 12월 20일 사업단 해체 다음날인가 차량 및 문서 반납차 본부로 갔었다. 업무후 아직 나의 다음 보직지가 결정되지 않아 인사참모부에 들러 상담좀 하려고 전화했더니, 2함대 평택전대 화학대 화학중대장으로 가란다. 해군에 복무하며 몇 안되는 편안한 자리였다. 아마 사업단장님께서 다음자리는 어디로 가고 싶냐고 예전에 물으시길래 동해로 돌아갈까 서울근처에 남아있을까 고민하다 수도권에 있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여기 평택에 그냥 남게 되었던것이다. 동해에서 사업단으로 나를 보낼때 다음보직은 꼭 신경써 주겠다고하고 제대전 마지막 보직이라서 또한 많이 배려해준것 같다. 덕분에 복무도 충실히 하면서 제대준비도 착실히 할 수 있었다.
    이게 아닌데 - 화학대장이 되다.
    화학대는 대장은 공석이고 본부대장이 겸임하고 있었으며 실질적인 화학대장업무는 중대장이 해야 했다. 그러니까 나는 실질적인 화학대장업무를 해야 했다. 그런데, 부임하고 업무파악이 되자 잘못된것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지난 일년간 사무용품 구입을 위하여 화학대로 배정된 금액중 한 달치만 화학대에서 쓰고, 나머지는 본부대에서 다 쓴것외에, 화학대장에게 나오는 특정업무비-격별비-를 본부대장이 받고 있었으나 그 돈은 화학대를 위하여 별로 쓰여지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는 연말 격려비까지... 규정에는 부대장이 공석일때는 차상급자가 지휘하고 특정업무비도 차상급자가 받게 되어있었으니, 이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었다. 그외에도 본부대장이 화학대를 지휘하다보니 화학대가 고유의 화생방, 소방/구난업무 보다는 본부대 일에 더 많이 매달려 있었다.
    많이 잘못되었다는것을 느끼던중 본부대장이 교체되었고 난 그 기회에 바로잡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전대장님께 중대장이 직무대리토록 정식문서로 건의 하였으나 전대장님은 내가 격별비에 욕심이있어서 그러는걸로 생각하셨는지 허락해주지 않으셨다. 참 재미있는 부분이다. 잘못된것을 고쳐야겠다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권고해도 요지부동이니... 참 답답한 조직인것 같다. 하지만 새로오신 본부대장님께서는 참 시원하신 분이었다. 찾아가서 말씀드렸더니 그렇지 않아도 일이 많아서 고민이었는데 잘 되었다며 화학대장 겸임을 사양하셨다. 그래서 중대장이던 내가 직무대리를 하게되었다.

    2001.6.5. 화학대 앞에서 대원들과...

    화학대 차고에 보관중이던 돌에 우리 대원들이 직접 글을 새겨 화학대 표지석을 만들었다.

    이 날 우리들은 10년 후의 자신에게 전하는 영상편지와 물건을 넣은 'Time capsule'을 묻었고, 2011년 6월 5일 일요일 13시에 이 장소에서 만나 Capsule을 열어보기로 하였다.


    이제 본부인사에도 2함대 화학대장이 공석인것으로 보고되어 있으니 새로운 화학대장이 올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살아가던 어느날 인사예고가 나왔는데 2함대 화학대장이 새로 부임한단다. 드디어 오는구나! 하고 기뻐하며 다시 보았더니 화학대장은 소령이 아니고 나보다 2년 후배 대위였다. 이런 후배를 상관으로 모셔야 하나?
    어쩔수 없이 함대 자체 장교인사명령으로 내가 제1대 평택전대 화학대장이 되었고, 화학대장으로 본부에서 배정된 후배 정해필대위는 중대장으로 보직되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화학중대장으로 편히 말년을 보낼 수 있었는데 괜히 발벗고 나섰다가 말년에 철저히 꼬이기 시작하였다. ▲Top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그래도 내가 화학대장이 되니 우선 부대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이 충분해서 너무 좋았다. 다른 지휘관들은 개인적으로 격별비를 유용하거나, 부대원들과 회식으로 그냥 먹고 마시는데 많이 쓴다지만, 나는 뜻있게 돈을 쓰고 싶었다. 우선 개인적인 용도로는 절대 사용치 않고, 장병들의 복지향상을 위하여만 돈을썼다. 체육용품 들여놓고, 자판기가 없는 대신 대기실과 사무실에 커피와 녹차를 놓고, 냉온 정수기를 들여 놓았다. 그리고 매달 10여 권의 도서를 구입하여 대기실에서 볼 수 있도록 하고, 매달 전역병이 있을때 마다 고기구워 격려연 을 여는 등... 사실 격려연을 열어 장병들에게 술을 마시게 할때 나는 참 마음 조렸다. 혹 격려연중 부대 어디서 불이 나서 화학대의 소방차가 긴급출동을 해야하지는 않나, 장병들이 술 마시고 사고는 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 화학대원들은 한 건의 사고도 없었다.
    나의 관심은 이렇게 어떻게하면 더 살기좋은 화학대를 만드는것인가였다. 특정업무비를 부대와 부대원을 위하여 썼더니 부대의 생활은 정말 윤택해졌고, 만족해 하는 우리 수병들과 부사관을 바라보며 난 참 흡족해 했다. ▲Top
    한미 연합제독훈련을 지휘하며...
    예전 인디펜던스에서 훈련할 때도 느낀것이지만 미군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할때는 참으로 우리들에게 훈련을 함께 할것을 강요하는것 같다. 2함대가 인천에 있을때는 한번도 않던 연합 제독훈련을 내가 화학대 근무하면서는 4번이나 하였다. 그것도 평택기지 울타리 안에서만... 그도 그럴것이 평택기지는 미군들이 침 흘릴만한 정말 좋은 기지였다.
    훈련시나리오는 우리 기지가 적의 공격으로 오염되었을때 미 육군 제독부대로 부터 지원을 받아 연합으로 제독하는 내용인데, 때로는 주위의 육군 OO사단 화학지원대도 합동으로 훈련을 하고는 하였다. 상황발생지역이 내가 책임지는 평택기지내라 훈련 기본계획이 연합사, 작전사에서 시달되면 구체적인 훈련계획을 세우고 모든 세력을 지휘하여 훈련을 하였다. 해군이 해상에서 미해군과의 연합훈련은 많이 했지만, 육상에서 미육군과 함께하는 연합훈련은 거의없었기에 상급부서의 관심은 참 많았다. 사령관님은 연합훈련을 통하여 미군들의 앞선 교리와 장비에 대하여 많이 배우라고 지시 하셨지만, 실질적으로 미군의 장비는 우리것보다 더 낙후되고, 고장도 많아 훈련이 지연되는 경우도 많았다. 교리도 상황시 환경과 여건을 고려하여 충분히 합리적으로 변경하여 적용할 수 있을텐데도 완벽히 교리에만 집착하였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교리대로 하지 않다가 발생하는 사고에 대하여서는 지휘관 자신이 어떻게 책임을 회피할 수 가 없다고 한다. 한국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미국과 미군에대한 절대적인 편견중의 하나를 알았다. 너무나 그들을 신임하고 믿는것 같았다. 꼭 그런것만은 아닌데... ▲Top
    "화학대장님 산불났습니다!"
    2001년 이른봄. 세번째 연합훈련 사전회의때인가? 평택기지 해군1회관 지배인실에서 미 육군 화학부대 작전참모와 우리측 장교들과 Meeting중 갑자기 내 휴대전화가 울려 받았더니, 전대 회계장 양하사였다.
    "화학대장님 산불났습니다."
    우리측에서는 나를 포함 중대장과 통제관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미군측에 양해를 구하고 중대장이 회의 주관토록한 후 급히 뛰쳐나왔다. 내 차를 끌고 산불이 났다는 부대입구 야산쪽으로 향하며 부대에 전화를 했다. "부대입구 원정삼거리 주변에 산불났다. 소방차 모두 출동해!" 현장에 도착했을때 산불은 북서풍을 타고 계속 번지고 있고 논에서 일하던 몇몇 농부들이 불길을 잡지 못해 애쓰고 있었다. 우선 현장파악이 급했다. 발화점과 불의 확산방향을 파악하고 지형을 파악해야 한다. 잠시후 우리 대원들이 소방차 3대에 나누어 타고 현장에 도착하였고 불머리 옆에서 우선 민가쪽으로 불이 번지지 못하도록 불을 잡아들어갔다. 어느정도 삼거리 민가 뒷쪽의 불이 잡히고 평택소방서 소방차도 하나둘 도착하였다. 이제 불머리를 잡아야 겠다는 생각에 2대의 소방차를 끌고 화두쪽으로 향했으나 민가와 산사이에서 진입로를 찾을수 없었다. 연기를 보아서는 서평택휴게소 뒷편인데... 마침 지나던 주민에게 입구를 물었더니 급히 가르쳐주었고, 소방서 소방차와 우리 소방차 2대가 그쪽으로 진입하였더니 불은 좁은 밭을 건너 휴게소 뒷편산으로 올라 붙고 있고, 내 눈에 휴게소의 주유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저 불을 잡아!" 급히 밭을 가로질러 도착한 우리 소방차와 대원들은 휴게소쪽으로 오르는 불을 잡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불을 더 크게 번질뻔 했던것이다. 그리고 반대편의 불을 잡아나갔다.

    그 바쁜 와중에 내 휴대전화는 계속 울린다. 함대 상황실, 당직실, 전대당직실, 작전사 상황실, 이사람 저사람... 지휘계통에 따라 보고와 지시가 이루어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기 하면 좋으련만, 워키토키 하나 없이, 메가폰 없이 현장지휘하며 전화도 받자니 정말 목이 아프다. 이래서 통신침묵-해군은 상황발생시 다른 부서의 망 개입을 금하고 있다.-이 필요한가 보다. 잠시후 소방헬기가 나타나 물을 뿌리며 지나가자 불길은 급속히 죽어갔고, 함대 수병들도 버스를 타고 본부대장님과 함께 현장에 도착하여 잔불정리에 참가하였다. 잔불정리는 참 중요하였다. 모든 불이 꺼진줄 알고 물러나고 있을때 우리 화학대 대원들이 갑자기 삽을 들고 뛰어 가길래 따라가 보았더니 산 중턱에서 다시 빨갛게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급히 삽으로 불을 끄고 잔불 확인후 현장에서 철수하였다. 화려한 토요일 오후였다. ▲Top

    국민을 위한 부대 - 구제역 방역 대민지원.
    '00년 봄 어느 토요일 아침 내 사무실로 부대 인근 우정면 면장님이 찾아왔다. 주변 다른 면에 구제역이 발생하여 우정면까지 번질 위험에 놓여 있으니 지원바란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구제역에 대한 보도를 많이보고, 다른 군 화학부대의 지원모습을 보아서 우리도 지원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라 바로 전대장님께 보고 드렸고, 전대장님도 급히 사령관님께 보고 드려 이틀간 우리 제독차를 이끌고 구제역 방역지원을 나갔다. 다음해 봄에는 전대장님께서 지시하셔서 우정, 포승면사무소와 협조하여 이틀간 방역지원을 나갔다. 제독차는 적의 화생방 오염을 제독하는 용도여서, 농약이나 약품 살포능력이 굉장히 우수 하였고, 탱크 용량도 면사무소나 일반 축산농가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몇 배는 커서 시간당 소독 면적도 더 넓어 구제역 방역 지원에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01년 5월 경기도청에서 구제역 방역공로자를 청와대 대통령님 만찬에 초대 한다고 공로자 한 명을 뽑아 달라하였다. 전대장님은 나에게 참석하라 하셨지만, 만찬일자가 알려지지도 않은 가운데 난 6월 10일부로 전역예정이었고, 실질적으로 두 해동안 제일 많은 공로를 세운 이윤섭 중위도 6월말 전역이라 소방소대장이 참석토록 하였다. ▲Top
    서해대교 개통식과 김대중 대통령 화생방 경호
    서해안 고속도로의 서해대교 건설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른 2000년 10월 말 청와대 경호실에서 전화가 왔다. 서해대교 준공행사시 김대중 대통령님께서 참석하시는데 우리 화학대가 대통령 화생방경호를 맡으라는 것이다. 화생방경호는 해당지역 군부대 화학부대에서 책임지는데 행사가 있을 행담도는 섬이라 해군의 소관이란다. 막막했다. 어떻게 해야하나... 어떤것으로 부터 대통령을 보호 해야할지, 테러인지, 적 특수부대의 공격으로 지켜야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하는지... 우선 경호실에서 원하는대로 한 장짜리 경호계획을 작성하였다. 정규전세력이나 특수부대의 공격에 대비하여 2대의 자동경보기를 섬 외곽에 배치하고, 1대의 자동경보기를 테러에 대비하여 행사장 단상 바로 옆에 배치하는 경호계획을 작성하여 사전회의에 참석하였더니 경호실에서 만족해 하였다.
    당일 아침 3대의 짚차, 1대의 제독차, 1대의 트럭 총 5대의 차량이 행사장이던 서해대교 중간의 행담도로 이동하였다. 2대의 짚차에 경보기를 설치하여 섬 주변에 풍상쪽으로 배치하고, 1대는 단상주변에 설치한 후 대원들은 제독차와 트럭에 분산하여 상황발생시 바로 제독작전에 투입할 수 있도록 행사장 뒷편 주차장에서 대기하였다. 나는 검측CP에서 총지휘하였다. 비가 내리는 추운 날씨속에 오후 3시 행사는 시작되었고, 별일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 아직 일반차량은 통행되지 않는 서해대교를 달려 부대로 돌아왔다. 우리 화학대와 대원들에게 참으로 명예스러운 작전이었다. ▲Top
    불나방같은 부하들
    2001년 4월 어느 토요일 아침 화학대 당직실에 전화벨이 울리더니 긴급출동 신호가 떨어진다. 군아파트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들어 온 것이다. '이런 제길!' 순간 내 입속에서 맴도는 말이었다. 그 날은 은경의 집에 처음으로 인사 가기로 한 날인데, 상황이 벌어지면 평택역에서 1시 기차를 타기 어려워 질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소방차 2대와 개인 승용차에 나눠타고 군아파트 쪽으로 달려갔다. 화학대옆 충무동산이라는 조그마한 언덕을 지나서 보니 아파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통 화재는 아니었다. 아니 아파트에서 난 불치고는 너무 검고 많은 연기였다. "남은 소방차 한대도 나오라고 해!" 부대 정문을 지나 아파트로 가까이 가서 보니 다행히 아파트에서 나는 연기가 아니라 뒷편 저 멀리 마을에서 나는 연기였다. 연기를 쫒아 달리다 서해안 고속도로 서평택 IC앞 사거리에서 소방차를 멈춰 세웠다. 아무래도 부대에서 너무 멀다. 민간 화재임에 분명한데 저기 까지 지원 나갈것인가를 내 선상에서 결정할 수 가 없어 전대장님과 함대 상황실로 전화를 계속하였으나 전대장님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 우선 잠시기다리고 있는데 소방차에 앉아 있는 대원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잠시후 전대장님으로 부터 전화가 오고 지원지시가 떨어졌다. "가자!"하고 내가 소리쳤더니 차에 있던 우리 수병들이 "야호!"하고 환호성을 지른다. '저런, 불나방 같은 놈들...' 난 행복에 찬 웃음을 지었다. ▲Top
    전역준비... 그리고, 7년만의 전역.
    7년 복무중 마지막 화학대장 자리에 있으면서 내 시간을 많이 가질수 있었다. '00년 여름은 완전히 수험생 생활이었다. 휴가는 물론 안가고 BOQ와 사무실을 오가며 공부만 하여 그해 겨울에 정보처리 산업기사와 전자상거래 관리사 2급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고, 더욱 욕심내어 '01년에는 워드프로세서 1급과 정보처리기사시험에 합격하였다. 바쁘고 고생스런 군생활이었지만 말년 보직을 잘 받아서 다행이었다.
    전역전 화학대를 위하여 해놓고 가야할 일이 많았다. 우선 후임 화학대장을 받는 일인데 원래 소령 자리에 대위인 내가 와서 근무하였지만, 정말 이 자리는 소령이 있어야만 할 자리였다. 너무나 넓고 중요한 제독책임지역, 계속되는 한미 연합훈련과 합참의 검열, 중요한 집단보호시설 운영, 많은 개인보호물자의 관리와 불출... 그래서 본부 인사, 작전에 화학대장을 소령으로 보직토록 건의하고, 전대장님께도 보고 드렸지만, 내 후임자는 없었고 중대장 정해필 대위를 화학대장으로 보직변경 하라고 한다. 해군이라는 조직이 진급과 출세를 위한 조직인지, 적과 싸워 이기고 조국과 바다를 지키자는 조직인지 모르겠다. 윗 사람의 관심이 많고 진급 잘되는 자리에는 정원 이상의 사람들이 들끓고, 또 서로 그 자리를 찾아 가려고 하지만, 이런 그늘진 보직은 아무도 오려 하지도 또 보내려 하지도 않았다. 분명 반드시 있어야 하고 중요한 일임에는 공감하면서도... 너무나 아쉬운 현실이다.

    꿈같던, 결코 흐르지 않을것 같았던 7년의 세월도 쏘아놓은 화살마냥 흘러 어느덧 제대날이 되었다. 6월 10일이 일요일이라 2001년 6월 9일 토요일 아침 평택전대장님께 전역신고를 드렸다. "필승! 신고합니다. 대위 장혁준은 2001년 6월 10일부로 현역에서 예비역으로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필승!" 이것으로 나의 7년 해군생활이 끝났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