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어려서부터 날쌔고, 힘이 세었다고 한다. 자라서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이 되어 선산만호(造山萬戶)로 봉직(封職)되었을 때 북쪽 오랑캐를 토벌(討伐)하였는데 공이 커서 일반적인 진급의 한계를 뛰어 넘어 부령부사(富寧府使)가 되었다가, 다시 종성(鍾城)으로 옮겨서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擊破)했다고 한다.
![]() |
1980년 6월 2일 경기도 지정 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된 원균장군의 묘.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82번지에 있다. |
"적변(賊變)을 처음 당하였을 때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였던것이요, 이순신이 스스로 달려간 것이 아니였으며 적을 공격함에 있어서는 원균은 스스로 죽기를 결심하고 매번 선봉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서 먼저 올라갔으니 승리의 공이 이순신과 꼭 같으며 원균이 잡은 적괴(賊魁)와 누선(樓船)은 도리어 이순신에게 빼앗긴 바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순신과 대신하게 이르러서는 여러번 계를 올려 부산앞바다로 들어가 싸울 수 없다는 뜻을 힘써 말하였으나 비국(備局:군무를 맡아보는 관청)에서는 독촉하고 원수(元帥: 도원수 권율장군)는 잡아다 곤장을 치니 드디어 원균은 패전할 줄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진을 떠나서 적을 공격하다가 전군이 괴멸하고 그 자신도 순국하였으니, 이는 원균의 용맹함이 삼군에 으뜸일 뿐 아니라 그의 지략이 또한 출중한 것이었다. 옛적에 가서한(哥舒翰)이 가슴을 쓰다듬으며 농궐(瀧闕)에 나갔다가 적에게 패한바 있었고, 양무적(楊無敵)은 반미(潘美)에게 협박을 당하여 눈물을 뿌리고 할 수 없이 싸우다가 드디어 적에게 패하여 죽었으니 어찌 이러한 일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으리오. 고금의 인물을 성패만으로써 논할 것이 아니라 그의 운과 시기가 어긋나서 공은 무너지고 일은 실패한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아프고 불쌍하게 생각되는 바이니라. 전번에 영상이 남하했을때에는 대체로 불쌍하다는 뜻을 보이더니 오늘에 이르러 공(功)을 의논하는 마당에서는 도리어 이등에 기록하려하니 어찌 원통하지 아니 하리오. 원균의 눈이 지하에서 감기지 못하리라."하시고 드디어 勳一等 第三人에 책봉하시었다.
갑진년(甲辰年:1604년) 4월에 효충장의 적의협력 선무공신 (效忠仗儀 迪毅協力 宣武功臣) 의 호를 하사 하시고 승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능군(崇錄大夫 議政府左讚成 兼 判義禁府事 原陵君)으로 추증하고 이듬해인 을사년(乙巳年:1605년) 5월 18일에 예부랑(禮部郞) 류황을 보내어 가묘(家廟)에 제사지내게 하시었다. 그후에 이학사(李學士) 선(選)이 공을 위하여 전기를 지어 공의 시종사실을 올바로 밝히고 심히 자세하고 명확하게 기술하였으니 그가 기술한 대략은 아래와 같다.
원균이 거느린 군사의 수가 아주 적고 그 세력이 심히 약하였으므로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였으나 그가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적선을 불태워 깨뜨렸고, 이 공으로 인하여 승급하였으며 이순신과 합세한 후에도 반드시 선봉이 되어 곧바로 적진에 침입하여 적과 싸움에 모두 승리하였으며, 비록 패전하였을 때에도 오히려 적선 10여척을 깨뜨렸은즉 그 충의의 공열(功烈)이 족히 일세의 호신(虎臣:용맹한 신하)이었다. 후세에 이순신을 위하여 문자를 희롱하는 무리들이 편협한 소견으로 원균을 여지없이 공박(攻迫)하니 원균이 이순신에게 비교하여 성패의 자취는 약간 다를지언정 나라를 위하여 죽은 절개는 다름이 없었거늘 어찌하여 혹은 억누르고, 혹은 찬양함이 이다지도 판이할 수 있겠는가.
공신호 (功臣號) |
공적(功績) | 1등급 | 2등급 | 3등급 | 합계 |
선무공신 (宣武功臣) |
임진왜란때 전쟁에서 세운 공 |
이순신 권율 원균 |
신점 군응수 김시민 이정복 이억기 |
정기원 권협 유산원 고언백 이광악 조경 권준 이순신 기효근 이운룡 |
18명 |
호성공신 (扈聖功臣) |
임진왜란 피난시 왕(선조)을 모신 공 |
이항복 정곤수 |
신성군 후 외 30명 |
정탁 외 88명 (내시24명 포함) |
122명 |
원능군 원균 선무공신교서(原陵君 元均 宣武功臣敎書) 전문번역
왕이 가라사대 위태함을 보고 용맹을 세움은 용감한 신하로서 군주의 한을 덜어주고자하는 충성심을 나타냄이요, 벼슬을 받고 훈(勳)을 책(策)함을 란지(鸞紙)에 기록함은 노고에 보답하는 식전(式典)인 것이다.이에 다시 슬피 증(贈)하여 굳센 영혼을 포상하고 권장하노니 오직 경은 농우의 인재요 서산의 장망(裝望)이라, 이경기의 힘센 팔은 많은 무리들과 능함을 다투고, 반정원의 호두(虎頭)는 만리의 고기를 기이함이 많도다. 맑은 분별은 집극의 별과 가까웁고 뛰어난 명예는 분부(分符)한 땅에 무성하도다.
자수(紫綬)를 북방 변방에 드리우니 초목도 그 이름을 알고 푸른 갑옷을 남쪽 언덕에 걸었으니 호리(狐狸)가 자취를 감추도다. 천삼(千三)의 비운과 백육(百六)의 재난의 때를 만난지라 해수가 무리지어 나르니 고래떼가 술렁거리도다. 세상을 어지럽게하는 속된 인간들은 감히 대방(大邦)에 원수를 삼고 큰 산돼지와 긴 뱀과 같은 사악한 무리는 상국을 거듭 침범할 것을 꾀하였도다.
궁벽한 땅밖의 소식이 어둡고 사나운 도적들이 내란을 꾀하니 당나라 조정이 서쪽으로 피란하고 진나라의 문물이 남쪽으로 건너감에, 의지하는 바는 경과 이순신의 의기를 합하고 규모를 크게 같이하여 바다를 덮은 과선(戈船)을 다스리게하니 창응(廠鷹)과 적작(赤爵)이오, 구름과 같이 연하는 전함을 배치하니 철통같은 장막이라 영을 절도 요지에 정하고 진은 상산의 수비를 점거하였도다.
장료유수의 형세가 삼엄하여 주유적벽의 군사보다 강성하고 적진을 무찌름이 날마다 10여개가 넘을뿐아니라 전투를 함에는 한달에 3번씩 전승첩보를 올렸도다. 전후하여 왜선을 격파한것이 130척에 이르고 적의 목을 베인것이 수 백급이요,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기타 적의 장졸들의 목을 베인 것이 237급이라 전공은 하뢰(下瀨)에 새기고 이름을 복파(伏波)보다 중한지라 군성이 이로 인하여 더욱 긴장하고 군기와 사기는 더욱 드높아지도다. 이와 같이 당가의 보장이 있으니 황제의 금성탕지를 논할 것이 없도다.
적은 아동의 수룡을 두려워하고 국세는 맹사의 산호가 숨어있는지라 아아 당시의 백전하는 용력이 오늘의 중흥의 기틀이 되었도다. 울분한 반평생은 오직 군주가 욕을 보면 신하가 죽는 것을 알았으니 눈물에 젖은 일면이 얼마나 위급한 때를 당하여 힘이 모자람을 한탄하였으리오. 장군은 죽었어도 산것과 같으니 비록 공업은 끝을 보지 못하였으되 사훈과 장상이 몰하여도 오히려 포상함이라 이에 책훈을 베풀어 선무 일등공신을 주어 3계급 작위를 초과하고, 그의 부모 처자도 또한 3계급을 초과하고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조카와 사위를 2계급 초과하고 적장이 세습하여 그 녹을 잃지 않을 것이며 영세토록 도울지어다. 인하여 노비 13명과 논 150결, 은자 10량, 옷감 한단과 내구마 한필을 하사하니 도착하거든 받을지어다.
인수는 한나라의 의식과 같이하고 문관은 주나라 법에 의하여 거조한다. 총질을 추가함은 충용한 마돈보다 빛나고 구훈을 추록함은 절의 있는 양찬에 비교할바 아니로다. 이에 명수를 더하여 존망을 위로 하노라. 태산이 닳고 하수가 마르도록 맹서함에 상렬의 위차에는 있지 아니하나 기린각에 성명을 쓰는데는 오히려 싸움에 어울려진 영웅의 자세를 생각할 것이로다. 혼백이 있거든 이 추가로 포장함을 받을것이로다.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다 알 줄로 믿노라.
일등 이순신 권율 원균
이등 신점 권응수 김시민 이정복 이억기
삼등 정기원 권협 고언백 이광악 조경 권준 이순신 기효근 이운룡
만력 32년 10월
▲HOME | ▲TO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