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사실 원균장군(1540∼1597)의 묘는 평택에 있기는 하지만, 서쪽에 있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분 역시 조선의 수군(水軍) 장수였고, 나라가 큰 난에 빠지자 자신을 버리고 조국을 위하여 죽음을 택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그를 많이 왜곡하고 있기에 여기 그의 행적에 대하여 간략히 적어본다.

역사의 허와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지난 역사를 거울삼아 내일을 설계하고 오늘을 살아가기에 바른 역사를 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아닐 수 없건만, 현대 위정자들의 어떠한 목적때문인지, 한 인물의 가치를 높이려다 보니 상대적으로 주변인물의 가치가 죽는 시소(Seesaw)의 원리 때문인지, 조선 수군장수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인식과 가치는 상당히 추상되어 있는 반면, 같은 시대와 장소를 배경으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조국의 땅과 바다를 침범하는 왜적과 싸우다 전장(戰場)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충정공 원균장군에 대한 인식은 역적, 졸장, 무능하고 겁많은 장수등의 모습으로 현대의 사관(史觀)은 그려내고 있다.

출생(出生)

公의 이름은 균(均)이요, 자는 평중(平仲)이고, 성은 원(元)씨이며 본관(本貫)은 원주(原州)로서 1540년 1월 5일 현재 장군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평택시 도일동에서 출생였으니,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보다는 5년 연배이다.
공의 시조는 고려 태조(太祖)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 병부령(兵部令) 극유(克猷)이며, 고조 몽(蒙)은 증(贈) 군자감정(軍資監正)이고, 증조 숙정(叔貞)은 증(贈) 병조참의(兵曹參議)이고, 조부 임(任)은 증(贈) 호조참판(戶曹參判)이고, 부친 준량(俊良)은 증(贈) 영의정(領議政)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날쌔고, 힘이 세었다고 한다. 자라서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이 되어 선산만호(造山萬戶)로 봉직(封職)되었을 때 북쪽 오랑캐를 토벌(討伐)하였는데 공이 커서 일반적인 진급의 한계를 뛰어 넘어 부령부사(富寧府使)가 되었다가, 다시 종성(鍾城)으로 옮겨서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擊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원균장군이 경상우수사가 되어 경상도에 부임하던 임진년(壬辰年:1592년) 그 해 4월 대규모의 왜적들이 부산진으로 상륙하여 부산과 동래가 차례로 함락되었다. 이때 공의 수하에는 단지 배 4척만이 있을뿐 이어서 혼자서는 부산앞바다를 가득메운 적과 싸워 이길수 없음을 깨닫고 이영남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에게 보내어 힘을 합하여 적을 막아내자고 청함에 이순신 장군은 각 수군의 한계(限界)가 있다고 듣지 아니하고 조정의 교지를 기다리다 5월 4일 새벽에야 비로서 출전케 된다.

출전

한편 원장군은 이장군이 도착하기 전에 몸소 수 척의 적과 교전하여 적선 10여척을 불사르고 빼앗았다. 5월 6일 비로서 전라좌수사 이장군이 전함 24척을 거느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장군과 함께 거제 앞바다에 모였고, 다음날인 7일 새벽 옥포앞바다에 진을 치고있던 왜선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다.
이 충무공에 관련된 많은 서적과 영화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남해안에서의 승리가 모두 이순신장군이 지휘하던 전라 좌수영의 수군들만 공적인듯 묘사되고 있으나, 이 당시의 수군은 전라 좌수사 이순신장군, 우수사 이억기장군, 경상우수사 원균장군의 3군 합동작전이였다. 원균장군은 비록 자신의 전함의 수는 적었으나, 모든 전투에서 선봉에 서서 맹전하였다고 한다.

전라병사로 전출

을미년(乙未年:1595년) 겨울에 충청병사로 임명되었다가, 병신년(丙申年:1596년) 가을에는 전라병사로 임명되었는데 선조께서 원균장군에게 이르시기를 "경이 국가를 위하여 진력하는 충용의 정신은 고금에 그 예를 비길데 없으니 내가 일찌기 가상하게 여겼으나 아직 그에 대한 보답을 못하던 터인데 이제 멀리 떠나게 됨에 친히 전송코자 하였으나 마침 심기가 불편하여 뜻대로 하지 못하였노라"하시고 궁중의 말 한필을 하사 하였다고 한다.

왜적의 계략

이 때 왜적들은 여러번의 해전에서 패배하여 서해안 수로를 따라 북상하여 육군의 군수품을 보급하려는 계획이 좌절되자,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은 계락을 쓰게된다.
소서행장은 왜인 요시나(要時羅)로 하여금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김응서에게 왕래하게 하여 온갖 정성을 다하는 척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정유년(丁酉年:1597년)에 이르러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다시 출전하게 됨에따라, 요시나가 은밀히 김응서에게 와서 말하기를 "두 나라가 화의가 성립되지 못하는 것은 오직 가등청정 때문이며 이로 인하여, 소서행장은 가등청정을 미워하는 바이다. 이제 가등청정이 바다를 건너오게되니, 만일 바다 가운데서 지키고 있으면 능히 생포할 수 있을 터이니 신중히 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라"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다.

경상우수사 김응서가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그 말을 믿고 위유사(慰諭使:천재 지변이 있을 때 국민을 위로시키려고 보내던 임시 벼슬) 황신을 보내어, 통제사 이순신에게 은밀히 알리고 출전토록 하였는데 이순신장군은 적의 계략인것으로 생각하고 출전을 거부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머뭇거리고 출전치 아니하니 군기를 그르치게 했다며 조정으로 잡아올려 투옥하고, 이해 3월 전라병사로 있던 원균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조정의 무리한 출전 독려

이순신장군을 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원장군은 조정으로 부터 부산 앞바다로 공격해 들어갈 것을 지시받고 적의 동정을 살핀 즉 적은 계략을 써서 우리를 속이고 있는것을 알아내고 부산 앞바다로 공격해 들어가지 못할 뜻을 진술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듣지 아니하고 부산진으로 출전하여 왜적의 함선을 무찌를 것을 지시한다.
원장군은 다시 계를 올려 꼭 부산 앞바다로 들어가야 한다면 안골포에 주둔한 적을 먼저 육지에서 육병으로 하여금 몰아낸 후에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 옳겠다고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듣지 아니하고 종사관 남이공을 보내어 출전할 것을 재촉한다.

계속되는 계략에 말려들다.

그 해 7월 초에 왜장 소서행장은 또다시 첩자 요시나를 경상우수사 김응서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왜선이 바야흐로 바다를 건너 온다는 연락이 있으니 방비가 없는 틈을 타서 수병으로 공격하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라고 속여 말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도원수 권율장군은 수군통제사 원균으로 하여금 속히 출전하여 적과 싸울것을 재촉하는지라, 원장군은 웅천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싸워 크게이긴다. 허나, 계속 강해지는 왜군의 군세를 본 원장군은 구원병을 청하여 다시 공격하고자 우선 군사를 물렸는데, 권율장군은 공이 머뭇거리어 기회를 잃었다 하여 원균장군을 잡아 들여 곤장을 쳐서 나무랬다. 이에 공은 일이 돌이킬 수 없이 잘못 되어가는 것을 알았으나, 원수부(元帥府)에서 죄를받았으므로 하는 수 없이 함선을 거느리고 곧 바로 부산 앞바다로 공격해 들어갔다.

칠천량해전

조선의 수군을 만난 적들은 도망가는척하고 아군을 유인하는지라 우리 수군은 기세가 올라 급히 적을 쫓아 공격해 들어가니, 어느덧 적진 깊숙히 들어간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너무 적진 깊숙히 들어온것을 원장군이 깨닫고 배를 돌려 퇴군하려 할 때에 적은 우리 군사들이 기세를 잃어버린 것을 보고 모든 병선을 다모아서 나는듯이 마구 쳐들어오자 우리 수군은 영등포로 퇴각하였으나, 왜군은 은밀히가벼운 배를 영등포 섬쪽에 보내어 잠복해 두었다가 우리 군사가 영등포로 퇴각하여 급히 배에서내려 나무와 물을 구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총포를 쏘며 사방에서 나타나 장검을 휘두르니, 조선 수군은 항구를 떠나 온나도로 후퇴 하였다.
이때에 해는져서 바다위는 어두워지고 쫓아오는 적은 바다를 덮고 오므로 군사들의 마음은 매우 위급한지라 원장군은 여러 장수들을 모아 말하기를 "오늘 전투계획은 오직 일심(一心)으로 순국할 따름이니라"하였다.

1980년 6월 2일 경기도 지정 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된 원균장군의 묘.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82번지에 있다.

순국

이 날밤에 적은 야음을 타고 작은배로 은밀히 우리 수군 진영사이로 뚫고 들어오게 하고 또 병선으로 밖을 포위하였다. 이 것을 모르고 있던 조선수군은 날이 밝을때쯤 우리 배에서 불이 일어남으로 급히 바라를 쳐서 변고를 알렸를 알렸으나 돌연 적선이 사방에서 공격해오고 탄환이 비오듯 날으며 고함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적세가 하늘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말아 올릴듯 하여 가히 대항하여 싸울 수 없는 형상이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먼저 닺을 거두고 달아남에 우리 수군의 전열은 무너지고 말았다. 원장군은 할 수 없이 배를 버리고 연안으로 올라갔는데 적이 따라와서 목을 베어갔다. 때는 정유년(1597년) 7월 16일이니 공의 나이 58세였다. 적이 물거간 후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묘소자리에서 제사지내니 조정에서는 예에 따라서 제문과 부의를 하사했다.

선조의 평가

1601년에 영의정 이덕형이 원장군의 제를 지내기위해 남쪽으로 떠나기전할 때 선조께서 불러 말씀 하시기를 "원균이 패하고 죽은 후에 아직도 헐뜯는 말이 그치지 아니함을 나는 원통하게 여기노라. 우리나라 풍속에 한 가지일을 잘하면 의례히 어질고 현명하다하고 한가지 일을 잘못하면 의례히 그르다 하는데, 이 패전은 어찌 원균에의 소위라 할 수 있으리오. 그 당시의 서장(書狀)을 보면 안골포의 적진을 먼저 몰아낸 후에 들어가 싸우자고 하였는데, 조정에서 싸움을 독촉하고 원수(元帥: 도원수 권율장군)는 원균을 잡아다가 곤장을 쳤으니 이는 원균 스스로가 패전한것이 아니요, 곧 조정에서 명령하여 패하게 한것이니라" 하였다. 이덕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대체로 이순신과 바꾼것이 잘못된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감이 다시말씀하시기를 "조정에서 시켜서 속히 싸우게 하는데야 장수를 바꾸지 않았다한들 역시 패하지 않았겠는가. 병법에서 말하기를 대장(大將)을 죽게한 자는 부장(副將)을 목자르고, 부장을 죽게한 자는 영장(領將)을 목자른다 하였으니 원균이 이미 패하여 죽었은 즉 그 부하를 비록 다 목베이지는 못할지라도 조사해내서 목베임이 가할 것이다." 하였다.

선무일등 공신으로 책록

癸酉年 (1603년) 6월에 손무공신을 녹훈(錄勳:훈공을 정하여 기록함)할 때에 이덕형, 이항복 등이 계(啓)를 올려 말하기를 "원균이 처음에는 군사가 없는 장수로 해상전투에 참가하였으나, 그 뒤에 주사(舟師:水軍을 이름)를 패망케한 과실이 있으니 이순신, 권율등과 더불어 같이 할 수 없어 내려서 이등으로 기록하였나이다." 하였다. 상감이 이르기를
"적변(賊變)을 처음 당하였을 때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였던것이요, 이순신이 스스로 달려간 것이 아니였으며 적을 공격함에 있어서는 원균은 스스로 죽기를 결심하고 매번 선봉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서 먼저 올라갔으니 승리의 공이 이순신과 꼭 같으며 원균이 잡은 적괴(賊魁)와 누선(樓船)은 도리어 이순신에게 빼앗긴 바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순신과 대신하게 이르러서는 여러번 계를 올려 부산앞바다로 들어가 싸울 수 없다는 뜻을 힘써 말하였으나 비국(備局:군무를 맡아보는 관청)에서는 독촉하고 원수(元帥: 도원수 권율장군)는 잡아다 곤장을 치니 드디어 원균은 패전할 줄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진을 떠나서 적을 공격하다가 전군이 괴멸하고 그 자신도 순국하였으니, 이는 원균의 용맹함이 삼군에 으뜸일 뿐 아니라 그의 지략이 또한 출중한 것이었다. 옛적에 가서한(哥舒翰)이 가슴을 쓰다듬으며 농궐(瀧闕)에 나갔다가 적에게 패한바 있었고, 양무적(楊無敵)은 반미(潘美)에게 협박을 당하여 눈물을 뿌리고 할 수 없이 싸우다가 드디어 적에게 패하여 죽었으니 어찌 이러한 일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으리오. 고금의 인물을 성패만으로써 논할 것이 아니라 그의 운과 시기가 어긋나서 공은 무너지고 일은 실패한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아프고 불쌍하게 생각되는 바이니라. 전번에 영상이 남하했을때에는 대체로 불쌍하다는 뜻을 보이더니 오늘에 이르러 공(功)을 의논하는 마당에서는 도리어 이등에 기록하려하니 어찌 원통하지 아니 하리오. 원균의 눈이 지하에서 감기지 못하리라."
하시고 드디어 勳一等 第三人에 책봉하시었다.

갑진년(甲辰年:1604년) 4월에 효충장의 적의협력 선무공신 (效忠仗儀 迪毅協力 宣武功臣) 의 호를 하사 하시고 승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능군(崇錄大夫 議政府左讚成 兼 判義禁府事 原陵君)으로 추증하고 이듬해인 을사년(乙巳年:1605년) 5월 18일에 예부랑(禮部郞) 류황을 보내어 가묘(家廟)에 제사지내게 하시었다. 그후에 이학사(李學士) 선(選)이 공을 위하여 전기를 지어 공의 시종사실을 올바로 밝히고 심히 자세하고 명확하게 기술하였으니 그가 기술한 대략은 아래와 같다.


원균이 거느린 군사의 수가 아주 적고 그 세력이 심히 약하였으므로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였으나 그가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적선을 불태워 깨뜨렸고, 이 공으로 인하여 승급하였으며 이순신과 합세한 후에도 반드시 선봉이 되어 곧바로 적진에 침입하여 적과 싸움에 모두 승리하였으며, 비록 패전하였을 때에도 오히려 적선 10여척을 깨뜨렸은즉 그 충의의 공열(功烈)이 족히 일세의 호신(虎臣:용맹한 신하)이었다. 후세에 이순신을 위하여 문자를 희롱하는 무리들이 편협한 소견으로 원균을 여지없이 공박(攻迫)하니 원균이 이순신에게 비교하여 성패의 자취는 약간 다를지언정 나라를 위하여 죽은 절개는 다름이 없었거늘 어찌하여 혹은 억누르고, 혹은 찬양함이 이다지도 판이할 수 있겠는가.

애마총의 전설

원균장군의 전사와 관련하여 전해지고 있는 애마총의 전설 또한 미물의 충절을 상징적으로 남기고 있다. 애마가 원균의 전사함을 알려주기 위하여 천리를 달려와 원균의 생가에 도착하여 신발과 담뱃대를 놓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에 원균의 죽음을 알게된 집에서는 영특한 말을 장군의 묘소 아래쪽에 고이 안장하여 그 넋을 달래게 되었다고 하며, 죽은 자리를 '울음받이'라하고 말이 묻힌 무덤을 '애마총'이라 하여 애마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임진왜란의 공신

임진왜란 공신선정에 있어 재미있는것은 선조께서 임진왜란과 관련되어 책록한 공신은 선무,호성공신이 있는데 아래 표에서 보듯이 바람앞에 놓인 등잔같은 조국의 운명을 구하고자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쳐 싸우던 이들은 18명이 공신으로 책록된 반면, 임금을 도와 피난길에 함께올랐던 이들은 무려 122명이나 공신으로 책록되어 그 수가 전쟁터에서 싸우던 이들보다 6배가 넘으니, 예나 지금이나 신명을 바쳐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이들보다 권력의 그늘아래서 자신의 안일(安逸)을 챙기는 자가 더욱 출세함은 변함이 없는것인가 보다.
공신호
(功臣號)
공적(功績) 1등급 2등급 3등급 합계
선무공신
(宣武功臣)
임진왜란때
전쟁에서 세운 공
이순신
권율
원균
신점
군응수
김시민
이정복
이억기
정기원
권협
유산원
고언백
이광악
조경
권준
이순신
기효근
이운룡
18명
호성공신
(扈聖功臣)
임진왜란 피난시
왕(선조)을 모신 공
이항복
정곤수
신성군 후
외 30명
정탁 외 88명
(내시24명 포함)
122명

원능군 원균 선무공신교서(原陵君 元均 宣武功臣敎書)

선무공신교서(宣武功臣敎書)는 1604년 (선조37년)에 발급된 것으로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이 끝난후 나라에서 공이 있는 장수들에게 내리는 록훈봉작교서의 하나였다. 원능군 원균을 선무일등공신으로 하여 증직을 내리는 문서이다.
이 교서는 국내에서 발견된 선무공신 교서중 일등공신의 교서로는 유일한 것이며, 그 역사성과 희귀성을 인정받아 1992년 4월20일 보물 제1133호로 지정되었다.


원능군 원균 선무공신교서(原陵君 元均 宣武功臣敎書) 전문번역

왕이 가라사대 위태함을 보고 용맹을 세움은 용감한 신하로서 군주의 한을 덜어주고자하는 충성심을 나타냄이요, 벼슬을 받고 훈(勳)을 책(策)함을 란지(鸞紙)에 기록함은 노고에 보답하는 식전(式典)인 것이다.

이에 다시 슬피 증(贈)하여 굳센 영혼을 포상하고 권장하노니 오직 경은 농우의 인재요 서산의 장망(裝望)이라, 이경기의 힘센 팔은 많은 무리들과 능함을 다투고, 반정원의 호두(虎頭)는 만리의 고기를 기이함이 많도다. 맑은 분별은 집극의 별과 가까웁고 뛰어난 명예는 분부(分符)한 땅에 무성하도다.

자수(紫綬)를 북방 변방에 드리우니 초목도 그 이름을 알고 푸른 갑옷을 남쪽 언덕에 걸었으니 호리(狐狸)가 자취를 감추도다. 천삼(千三)의 비운과 백육(百六)의 재난의 때를 만난지라 해수가 무리지어 나르니 고래떼가 술렁거리도다. 세상을 어지럽게하는 속된 인간들은 감히 대방(大邦)에 원수를 삼고 큰 산돼지와 긴 뱀과 같은 사악한 무리는 상국을 거듭 침범할 것을 꾀하였도다.

궁벽한 땅밖의 소식이 어둡고 사나운 도적들이 내란을 꾀하니 당나라 조정이 서쪽으로 피란하고 진나라의 문물이 남쪽으로 건너감에, 의지하는 바는 경과 이순신의 의기를 합하고 규모를 크게 같이하여 바다를 덮은 과선(戈船)을 다스리게하니 창응(廠鷹)과 적작(赤爵)이오, 구름과 같이 연하는 전함을 배치하니 철통같은 장막이라 영을 절도 요지에 정하고 진은 상산의 수비를 점거하였도다.

장료유수의 형세가 삼엄하여 주유적벽의 군사보다 강성하고 적진을 무찌름이 날마다 10여개가 넘을뿐아니라 전투를 함에는 한달에 3번씩 전승첩보를 올렸도다. 전후하여 왜선을 격파한것이 130척에 이르고 적의 목을 베인것이 수 백급이요,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기타 적의 장졸들의 목을 베인 것이 237급이라 전공은 하뢰(下瀨)에 새기고 이름을 복파(伏波)보다 중한지라 군성이 이로 인하여 더욱 긴장하고 군기와 사기는 더욱 드높아지도다. 이와 같이 당가의 보장이 있으니 황제의 금성탕지를 논할 것이 없도다.

적은 아동의 수룡을 두려워하고 국세는 맹사의 산호가 숨어있는지라 아아 당시의 백전하는 용력이 오늘의 중흥의 기틀이 되었도다. 울분한 반평생은 오직 군주가 욕을 보면 신하가 죽는 것을 알았으니 눈물에 젖은 일면이 얼마나 위급한 때를 당하여 힘이 모자람을 한탄하였으리오. 장군은 죽었어도 산것과 같으니 비록 공업은 끝을 보지 못하였으되 사훈과 장상이 몰하여도 오히려 포상함이라 이에 책훈을 베풀어 선무 일등공신을 주어 3계급 작위를 초과하고, 그의 부모 처자도 또한 3계급을 초과하고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조카와 사위를 2계급 초과하고 적장이 세습하여 그 녹을 잃지 않을 것이며 영세토록 도울지어다. 인하여 노비 13명과 논 150결, 은자 10량, 옷감 한단과 내구마 한필을 하사하니 도착하거든 받을지어다.

인수는 한나라의 의식과 같이하고 문관은 주나라 법에 의하여 거조한다. 총질을 추가함은 충용한 마돈보다 빛나고 구훈을 추록함은 절의 있는 양찬에 비교할바 아니로다. 이에 명수를 더하여 존망을 위로 하노라. 태산이 닳고 하수가 마르도록 맹서함에 상렬의 위차에는 있지 아니하나 기린각에 성명을 쓰는데는 오히려 싸움에 어울려진 영웅의 자세를 생각할 것이로다. 혼백이 있거든 이 추가로 포장함을 받을것이로다.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다 알 줄로 믿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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